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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예 누나

고래가 사는 세상

by 구일권

순예 누나는 원주 근처 어디 살다 지인의 소개로 우리 집에 오게 됐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인가 그랬고 누나는 17살 정도 됐던 걸로 짐작한다. 선이 굵고 까마잡잡한 얼굴의 누나를 어렴풋이 떠올려 보면 소피아로렌 같은 서구적인 느낌이었다. 누나는 어린 아기였던 내 동생을 업고 집안의 심부름이나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며 지냈다. 그런데 가끔 나타나는 약장수들의 아코디언이나 색소폰 소리만 들리면 나중에 울 어머니에 야단을 맞을지언정 만사 제쳐놓고 나를 데리고 그리로 달려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순례누나가 없어졌다. 어머니 얘기로는 돌팔이 약장사 꼬임에 넘어간 게 분명하다고 했다. 그러고는 한두달 지났을까 누나가 초췌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엄마는 야단도 치질 않고 누나와 심각한 얘기를 나누는 듯했다. 나중에 옆집 아줌마 얘기를 얼핏 들으니 누나가 임신을 해서 왔기에 엄마와 같이 어딘가 가서 잘 해결하고 왔다는 얘기 같았다. 그런 후 누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용히 지냈다. 우리 집 방이 세 칸이었는데 안방에선 엄마와 어린 동생이 또 다른 방에는 누나와 내가 자는 방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답답해서 눈을 떠보니 누나가 숨 막힐 정도로 나를 꼭 껴안은 채 다리로 감싸고 있었다. 약장수가 팔던 싸구려 동동 구리무 냄새가 나는 누나의 몸을 빠져나와 나는 얼른 엄마가 있는 방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 누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를 보았지만 나는 그 충격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어 늘 엄마가 있는 안방에서 잤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 아기도 아닌데 왜 자꾸 여기서 자느냐고 뭐라 하셨다. 할 수 없이 다시 누나와 잘 때는 멀리 떨어져 잠을 잤지만 어느샌가 누나는 내 옆으로와 자고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누나가 시집간다고 했다. 신랑은 우리 앞에 사는 사단장집 운전병이라 했다. 우리 엄마 얘기로는 예의 바르고 싹싹한 청년이라 칭찬했다. 그리고는 그해 가을 누나는 결혼식을 올렸다. 드레스를 입은 누나가 그렇게 이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엄마는 식장에서 눈물을 보였고 누나 가족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떠난 누나가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선물 꾸러미를 들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사는 곳은 전주인데 남편이 고속버스 운전을 한다고 그랬다. 옷차림이나 반지등 장신구를 보니 신수가 훤 해 보였고 검으스레 했던 예전 얼굴과는 전혀 다른 뽀얀 얼굴이 돋보였다. 그러면서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갈거라 했다. 저녁을 먹고 엄마와 한참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더니 누나는 내 방에서 같이 잘 거라며 이불을 들고 왔다. 옆에 누운 누나에게서 나는 향긋한 코티분 냄새가 나를 한동안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누나는 내게 용돈 하라며 큰돈을 내게 주고 떠났다. 누나의 뒷모습을 보니 뭔가 아쉽고 허전했다. 방학 때마다 춘천 서면 외갓집에 갈 때면 밤에 내 앞에서 스스럼없이 옷을 벗으며 소양강에서 수영을 가르쳐 주던 누나였다. 그런 생각 속에 누나가 우리 집 살 때 내가 중학생 정도만 됐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발칙한 생각을 해봤다. 왜냐하면 중학생이 된 나는 고금소총 이나 소녀경 같은 걸 탐독하며 성을 깨우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후 처음으로 나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 종순이 에게서 누나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그건 누나가 나의 첫사랑 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이 생각났다. 놓친 고기는 커 보인다고. 그런 건가?! 내 나이보다 훨씬 많았으니 지금 80은 넘었을 텐데 만일 살아 있다면 사는 동안 부디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잘 지내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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