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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딧불이(firefly) 야

고래가 사는 세상

by 구일권

20 대는 장작불 30대는 연탄불... 70대는 반딧불과 같다는 그런 유머가 있더군요.

반딧불 보고는"불도 아닌 게 불인 척 반짝거린다나요"

부정할 수만은 없는 맞는 말이지만 이런 소리를 듣게 되는 이내 마음도 헤아려 주면 좋겠어요.

하지만 따뜻하고도 아련한 빛을 머금은 반딧불이의 얘기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기억과 마음속에 은은히 남아있었어요. 깊은 산골짜기, 바람도 조용히 숨을 죽인 여름밤나무들 사이로 반짝이는 불빛이 하나둘 피어나지요. 호롱불도 별도 아닌 바로 반딧불이가 말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반딧불이를 조상의 영혼, 또는 밤을 밝히는 작은 요정이라고 여겼대요. 밤에 개구리 소리만 요란한 논두렁이나 계곡에서 반딧불이를 보면 돌아가신 분들이 다시 찾아온 것 같다는 생각에 약간은 긴장을 하며 마음속으로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다고 그러더군요.

그러나 동네 아이들은 손에 유리병을 들고뛰어다니며 반딧불이를 잡기도 했습니다. 나도 그랬구요. 그 작은 생명체가 내 손 안에서 희미하게 빛날 때면, 우리들 눈에는 그것이 보물 같았지요. 하지만 반딧불이는 오래가지 않았어요.

빛을 밝히는 건 생의 마지막을 알리는 신호래요. 짧게 빛나고 조용히 사라지는 생, 그래서 더 아름답고 슬프기도 합니다. 반딧불이는 깨끗한 물과 공기에서만 살 수 있어요. 그래서 반딧불이가 보인다는 것은 그곳이 얼마나 건강한 자연을 가진 청정지역 인지를 말해주기도 하지요.


더운 어느 여름밤 아무도 없는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작은 불빛 하나를 보았어요. 앗~ 반딧 불인가! 작게 깜빡이며 빛을 내고 있었어요. 잠깐이지만 먼저 가신 그리운 사람들의 작은 안부를 전해 주려는가 하고 그 불빛을 따라 다가갔지요. 그랬더니 아파트 담장 어두운 구석에서 누가 담배를 피우더군요. 아~~ 감성 파괴, 그놈의 담배..... 금연 아파트라고 숨어 피우는듯한 그 모습이 반딧불이 보다도 더 측은해 보였어요.


내가 반딧불이를 처음 만난 곳은 초등학교 때 춘천 서면 외갓집 뒷산에서였는데, 수많은 반딧불이의 향연은 요즘 보는 드론의 군무 와도 같은 느낌이었어요. 어른이 된 후에는 말레이시아 어느 섬에서 볼 수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 틈에서 즐길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별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이탁 한 하늘, 손주들에게 반딧불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인데, 알아보니 일본의 호타루(반딧불) 축제 등 여러 나라에서도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곳은 따로 있다는군요. 우리나라도 전북 무주 남대천 일대에서도 6~7월에 반딧불이 축제가 열린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들에겐 좋은 경험과 추억을 남길 수 있어 권장할만하겠지만 그곳도 사람들이 엄청 몰릴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드니 망설여지긴 합니다.

그러고 보니 옛이야기가 하나 떠올랐어요. 형설지공 (螢雪之功) 이란말 기억 하시나요? 다시 기억을 되살려 드리자면 아주 오래전, 중국 진나라에 차윤이라는 소년이 살았대요. 가난한 집안이라 밤이면 등불 하나 켜기도 어려웠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지요. 여름이면 반딧불이를 자루에 가득 담아 그 빛으로 글을 읽었고 겨울이면 흰 눈이 창가에 쌓이기를 기다려 그 반짝이는 빛에 책을 펼쳤다고 해요.

그만큼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인데 중국인들의 과장된 표현 때문에 반만 새겨듣는 편이지만 이 얘기는 그러고 싶지 않더군요.

가끔 생각해 봅니다. 내 삶에도 그런 반딧불이가 필요하긴 했지만 스스로 품고 걸어가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어요. 이제야 깨닫고 있지만 작아도 포기하지 않는 빛하나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예전의 차윤이, 그리고 지금의 내가 조용히 전합니다.

반딧불이 같은 우리네 인생, 얼마 전 친구 하나를 떠나보냈습니다. 오랜 고통 속에 지내다 생을 마감한 친구의 병명은 근육 감소증이라고 하던가요. 살다 보니 참 별의별 병명도 다 있다 싶더군요. 장례식장에서 어느 친구가 , 우리 나이면 살만큼 산거 아니냐고 그랬어요. 그러나 오래 살긴 살았어도 생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게 사람들의 인지상정 아닌가 라는 생각 속에 모두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을 잊은 거 같았습니다.


"반딧불의 묘 "라는 유명 일본 작가의 글에 나오는 비극적인 이야기 대사 중 하나인데 "반딧불이는 왜 이리 빨리 꺼져 버리는 걸까"라는 얘기는 짧고 덧없는 생명을 얘기하기도 했지요. 그런 아쉬움 때문인지 문득 전에 봉은사 어느 보살님의 말이 생각나더군요. 하늘나라로 떠난 반려견을 못 잊어 메모리얼 스톤을 만들어 보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절에서도 가끔은 먼저 가신분의 유골을 스톤으로 만들어 보관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얼마나 그리우면 그렇게 까지 할까! 내 마음이 메말라 버린 건지 내게 그리 와닿지는 않았어요.

지구의 황폐화로 점점 사라져 가는 반딧불이, 그렇게 어린 추억 속의 반딧불이를 쉽게 찾아볼 수 없기에 사람들은 황가람이 부르는 반딧불이 노래에서나마 그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하늘에서 허락해 준 시간이 반딧불 이나 마찬가지란 생각이지만 나중에 진짜 반딧불이 되어 돌아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내게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학술적인 명칭인 반딧불이보다는 정감 있는 개똥벌레로 불리는 게 더 좋지 않나요. 하여간 내가 담뱃불 정도는 되는 줄 알고 살았는데 어느새 개똥벌레가 되어있었군요. 그러나 개의치 않습니다. 어차피 불 지필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요.


"P.S: 이 글을 읽고난 친구 녀석들중에 자기는 아직 군불이나 촛불 정도는 된다고 빡빡 우기더군요. 언젠가 만나게 되는 반딧불이, 그전까지는 힘내라고 문자 날렸는데 왜 뒤끝이 씁쓸한지 모르겠습니다. 쓰 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