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낮아진 날 꿈속에 남겨 둔 주소

고래가 사는 세상

by 구일권

어젯밤 나는 언젠가 왔었던 곳에 있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동네의 왼쪽은 바다, 오른쪽은 호수가 있고 호수 주변의 집들 뒤에는 내가 가끔 들리는 시장도 보였다.

하늘은 보랏빛 안개로 거리는 이상하리 만큼 적막했다.

그리고는 쩍 하고 하늘이 갈라지는듯한 소리와 함께 세상이 하얗게 번졌다. 눈부신 섬광, 그리고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정적 속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 채 나는 무너진 집들 사이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신을 차린 뒤 밖으로 나와보니 저 아래 바닷가로부터 올라오는 길 주변의 아름다운 집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색의 기와들로 은은한 빛을 발하는 테라코타 지붕의 집들이었는데 그곳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만 것이다.


눈을 뜨면 사라지고, 잠들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장소.

지도에도 없고 이름도 없지만, 나는 매번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었다. 앞으로 그도시는 내게 어떤모습으로 나타날까?

꿈은 친절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나를 그곳에 데려다 주니 말이다. 그곳에서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없지만 그런데도 외롭진 않았다. 이미 지나간 시간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은 얼굴들. 내가 잊었다고 믿는 것들이 꿈속에서는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꿈속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깨어날때면, 눈을 뜨는 순간 더머 물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다시눈을 감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밤에 진짜 나를 만나러 가는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끝내하지 못한 말이나 용기 내지 못한 선택, 놓쳐버린 장면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꿈은 사라지지만 꿈속의 장소는 늘 남아있기에 나를 기다리고 언제든 반겨주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곳처럼. 풍경은 분명한데 설명하려 하면 흐릿해진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꿈속의 풍경은 그리스 아테네의 어느 산 위에서 내려다본 그때 그 도시의 첫인상과 흡사했다. 늘 핵전쟁 이후일 것 같은 그런 세계였다.

불타버린 도시 그 모습은 영상으로 봤던 폭격으로 폐허가된 가자지구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불타고 무너진 건물, 소리가 사라진 거리. 모든 것이 끝난 뒤의 시간인데도 이상하게 공기는 고요했다.

두려움보다 먼저 드는 감정은 낯선 평온이다.


그런 곳에서 나는 소녀를 만났다. 목발을 짚고 천천히 힘겹게 언덕을 올라오던 소녀, 서로 눈은 마주쳤지만 서로 인사도 나누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잠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사라졌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 꿈속에서 본 그 소녀 어디서 봤던 얼굴이기에 곰곰이 생각하며 기억을 되돌려 보니 아주 오래전 후포가 고향인 학교친구가 소개해줬던 여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꿈속에서는 하얗고 파리한 얼굴이지만 그때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랐던 탓일까 얼굴이 까만 콩 같이 발그레한 귀엽고 수줍은 여학생이었다. 잊었던 감정이 나를 다시 찾아온 걸까!

현실에서는 사람을 만났다면 내가 누군가를 말했을 테고 그간의 사연을 들으며 위로를 보냈을 텐데 멍청하게 바라만 보았던 그 소녀는 나의 과거였고 내가 지키지 못했던 미래처럼 느껴졌다.

노을빛사이로 스쳐가는 그녀의 향기는 바람 따라 내게 전해졌다. 무너진 세상 그건 어쩌면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인지도 모른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 살고 있는 걸까?

바라나시로 가는길을 찾고 있는걸까?

핵전쟁이 모든 걸 무너뜨렸는데도 그 소녀는

슬픔도 잊어버린듯,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길을가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순간 나는 느꼈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미래의 세계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안타까움.

우리는 깨어 있는 동안 그 모습을 외면하지만 잠들면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을, 오늘 밤에 나는 다시 그곳으로 갈지 모른다. 그 소녀를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그러나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꿈에서 조용히 볼 수만 있으면 되니까.

*꿈에서 가끔 가는 골프장

아주 악산에 자리 잡은 험악한 코스라 늘 스릴과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다 갈때마다 꼭 뭘하나 빠뜨리고 가는 바람에 온존하게 골프를 즐긴적이 없다. 황당,당혹,수치,후회

속에서 안간힘을 쓰다 깨어나면 영화 인디애나 죤스 한편을 다 본듯 몸이 오그라들어 있었다.

내면의 불안감 때문일까! 다시 찾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장소중 하나다. 내게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도 잘모르는 요즘, 꿈에 그리던 사람들을 찾게되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잠들기 전 내가 가려하는 그 장소를 잊지 않으려 마음속에 한 번 더 적어둔다.


know who i am

具 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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