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어느 날 아침 찌푸린 날씨에 낮게 깔린 무거운 구름을 바라보다 기(氣)라도 받아야 답답한 내 삶에 활력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갑작스러운 생각에 간단한 채비를 한 후 차를 몰아 사와로 선인장만 보이는 황량한 66번 도로를 따라 세도나로 향했다. 가는도 중 진눈깨비가 너무 내리는 바람에 어느 길가에 잠시 차를 멈추고 커피를 사러 가는데 길가에 서있는 동상을 보니 이 동네가 이글스의 노래 속에 나오는 윈슬로(Winslow)라는 동네였다. 전에 들어본 기억이 나 새삼 거리를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이글스의 그 노래가 흘러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멈칫하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그때 이글스의 take it easy라는 노래가 어느 카페 안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와본 적이 있는듯한 이 도시는 살면서 여러 번 경험했던 데자뷔를 또다시 이곳에서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아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를 뜰 수 없었고 신내림이라도 받아야 할 것 같은 마음으로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마음 내키면 아무 때고 훌쩍 떠나는 나의 여행습관 속에는 전생(前生)이니 윤회(輪廻)니 하는 이런 단어들이 함께 했고 그러기에 나의 필명도 구평(具萍)이 된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 석양을 향해 걷고 있는 노땅인 내가 글로써 흔적 한번 남겨 보려 시작했지만 학교 다닐 때도 밤새워 공부해본 적이 없던 난데 글 한번 써본답시고 그야말로 헤일수 없이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처음 겪는 산고(産苦)의 고통이니 이런 표현은 과장됐지만 정말 글을 써보니 머리도 어지럽고 궁둥이뼈까지 아파오는 걸 참아가며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나의 등을 두들겨 주며 격려해 주고 싶었다. 이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많은 부분을 끄집어내어 적은 것 같긴 한데 다시 읽어보면 볼수록 고쳐 써야 할부분이 자꾸 생기는 바람에 점점 맥이 빠져간다. 물론 글자체가 엉성하리라는 각오는 하고 있지만 어찌 됐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글이 쓰이길 바랬는데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나의 글은 어떤 모양새 일까 하는 궁금함과 걱정스러운 마음만 교차할 뿐이다. 처음에는 여행의 경험을 글로 옮겨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수많은 여행의 달인들이 쓴 글을 보면서 그들의 경험과는 너무 뒤떨어져 혹시 어릴 때 읽었던 김찬삼의 세계일주 같은 고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난 여행을 통해 얻은 얘기들을 글로 적어보는 잡기로 돌아서고 말았다. 글을 쓰며 지난 기억의 필름을 되돌려보니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라는 누구의 말처럼 이제는 내게 남아있는 좋았던 기억만을 남기며 나머지는 하나하나 지워나가려 한다. 처음 목 넘김이 좋았던 와인의 끝 맛도 똑같은 그런 와인처럼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좋은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런 괜찮은 사람이었기를 바라면서 누군가 내 글을 읽다가 고루하거나 진부한 느낌이 들면 책을 덮고 냄비 받침대로 라도 사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레트로 감성이 묻어있는 지난 추억들을 만날 때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나이가 된 나에게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코로나19가 내게는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고 나 자신을 감싸며 내 머리가 기억하는 나만의 랜선 여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