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북이 고향인 우리 외가는 만주서 살다 해방 후 압록강 근처로 이사한 후 1949년도 말에야 서울로 피란 내려왔다고 들었다. 그중 만주에서 결혼한 둘째 이모만 만주 용정 이란 곳에 살았는데 해방 후 언제부터인지 연락이 끊긴 채로 지내던 중 88년도쯤인가 어머니가 해외 이산가족 찾기 인지 그런 라디오 방송에 용정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모를 찾는다는 신청을 했던 모양인데 놀랍게도 연락이 닿았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사는 어머니 일곱 형제들은 모처럼 모두 모여 중국에 사는 이모의 옛날이야기로 밤새는줄 모르는것 같았다. 우연인지 당시 나는 중국 동북삼성의 초청을 받아 출발하기 얼마 전이었는데 마침 어머니의 얘기를 들은 나는 그곳 연길에서 이모님을 만나 어머니 형제들의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 애틋한 정을 이어주고 싶었다. 초청 관계자를 홍콩에서 만나기로 하여 도착해보니 우리뿐만이 아니고 일본. 대만. 싱가포르 등에서 많은 사람들을 초청한 것 같았다. 우리는 몇 대의 중국 프로펠러 비행기에 나눠 타고 홍콩을 떠나려 비행기에 올랐는데 스튜어디스들은 우리가 비행기에 오른다는 연락을 못 받았는지 미쳐 먹지 못한 도시락을 황급히 치우는 것이었다. 양은 도시락에 담긴 찐계란과 생선조림 같은 게 얼핏 보였는데 그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는 데다 스튜어디스 유니폼 또한 바랜 군청색에 옷이 작은지 속셔츠가 삐져나와있어 다른 나라 승무원들과 비교해보면 당시 중국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기내 간식으로 사과도 통째로 주던 그런 중국이었는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경쟁을 하고 있다니 정말 빠른 발전 속도에 놀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하여간 마구 요동치는 프로펠러 비행기는 미드웨이 해전에 출격한 폭격기 처럼 하늘을 날았고 나는 경직된 자세로 마음도 쫄아 있었다. 그런 비행끝에 무사히 선양에 도착한 나는 호텔에서 바로 전보(電報)로 이모님께 연길 도착 시간을 알린 후 호텔 밖으로 나가보니 시내에 전차도 다니는 풍경은 옛날 야인시대라는 영화에서 보던 일본거리 같았다.호텔 근처에서 발견한 한글 간판에 고기가 걸려있는 어느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식탁 옆에서 누워 자고 있던 아가씨 둘이 후다닥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때가 10월로 기억하는데 그곳은 이미 추위가 시작되고 있었는지 그 젊은 처자들은 두터운 이불에 내복까지 입고 있었다. 잠시 후 들어온 조선족 주인은 우리를 보더니 너무 반가워하며 남한에서 온 사람들은 처음 이라며 신나게 음식 준비를 하며 어디서 가져왔는지 나훈아 테이프까지 틀어주며 한껒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큰 쟁반에 소고기, 양고기 등을 넘치게 마구 내오기에 혹시 바가지 쓰는 건 아닌지 내심 신경이 쓰였지만 곱게 단장하고 돌아온 조선족 아가씨들의 청아한 노랫소리를 들으며 옛날 분위기에 젖어 들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계산을 하려는데 늦게 도착해 환전을 못한 우리는 중국돈이 없어 US 100불을 줬더니 너무 많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타지에서 살아온 우리 동포를 만난 게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억지로 손에 쥐어주고 나왔다. 주인은 내일도 꼭 와달라고 했지만 다음날은 초청자들과의 일정 때문에 다시 들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선양을 떠나 연길공항에 도착했는데 입국 쪽 많은 사람들 중 한국의 이모들과 얼굴이 꼭 닮은 사람을 바로 발견할 수 있었고 나중에 내가 묵는 호텔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는데 호텔로 가는 도중 닮은 얼굴을 바로 찾았다는 게 너무 신기해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호텔 도착 후 기다려도 오시질 않기에 호텔 정문으로 나가보니 호텔 안으로 들여보내 주질 않아 모두 밖에 서있었다. 우리 인솔자에게 부탁하여 공안 직원으로부터 2시간 외출 허가를 얻은 후에야 밖으로 나가 근처 어느 식당에서 처음 이모님 가족 등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미쳐 선물을 많이 준비 못해 다시 호텔로 돌아가 동행한 사람들로부터 선물 될만한 물건들을 수거 가족들에게 전해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전해 달라는 돈과 편지를 전달하고는 그렇게 아쉬운 작별을 했다. 백두산을 들린 후 장춘 , 할빈 그리고 북경을 거쳐 돌아오는 길은 정말 힘든 여정이었다. 백두산 숙소 천지 빈관에서는 호텔방이 너무 추워 옷을 다 입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데도 밤새 벌벌 떨었고 백두산 정상은 일기가 나빠 안개만 보고 내려와 너무 아쉬웠다. 그렇게 또 백두산서 장춘까지 버스로 가는데 비포장 도로로 10시간 정도를 달린 기억인데 누군가 돌리는 술기운으로 버텼지 아니면 쓰러질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매일 주최 측에서 차린 만찬이나 고량주 냄새도 징그러워 한국으로 돌아온 한참 동안 고량주 근처도 가지 않았다. 장춘 어느 호텔 로비에서 우리에게 명함을 건네던 북한 고려 국제 여행사 직원의 인사에 바짝 긴장했던 기억이나 할빈 송화강 근처에서 만난 도라지 무침을 팔던 조선족 할머니가 도라지 값을 안 받으시겠다고 극구 사양하시던 그 모습 등 옛 우리 땅에는 그때까지도 한국인의 깊은 정이 남아있었고 독립군이 활약했을 만주 벌판을 바라보며 가슴만 휑해졌다. 그 후 어머니 형제들의 노력으로 이모를 초청하였고 한국에 두 달인가 지내시다 형제들이 마련해준 돈과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돌아가셨다. 그 후 연길에 계신 이모가 외삼촌에게 아들과 며느리를 한국에 초청해 달라고 부탁했던 모양인데 우리 어머니도 싱가포르 동생집에 가계 서서 그 사정은 아시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하여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초청을 못해 줬더니 연락을 끊은 거 같다고 전해 들었다. 어쩌면 이미 한국에 와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이곳 이모 형제들이 다 돌아가셨으니 서로의 관계는 끊어진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애타게 찾는 남북 이산가족도 만남 그때뿐이지 막상 만나 북한의 가족들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와 같은 상황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이북에 사는 자식이나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려면 대부분 자식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그 마음 십분 이해는 가지만 재정능력이 없는 노인들은 난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저 마음으로 그리워하며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만 간직 한채 떠나는 게 더 아름답고 행복할 것 같다는 내 생각이다. 해란강의 푸른 일송정과 말달리던 만주 벌판 그곳에 골프장이 들어섰다니 우리 항일역사의 흔적이 점점 퇴색되어 가는듯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의 옛땅을 빼앗긴 것만 도 억울한데 동북공정(東北工程)이니 하며 우리를 희롱하는듯한 중국의 행태에 분노하며 후손들의 무력함으로 백두산마저 반쪽은 장백산이라 부르는 현실은 옛 조상들이 통탄할 노릇일 것이다.
동북공정: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한 동북쪽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로 그 목적을 위한 역사 왜곡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중국의 전략지역인 동북지역, 옛 고구려. 발해 등 한반도와 관련된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어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영토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