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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권 Apr 03. 2022

노을이 슬픈 여행

75세가 지나면 렌터카로 돌아다니는 그런 여행은 접을 생각이다. 전에는 그런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도 며칠만 쉬면 회복이 가능했지만 이젠 영영 못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얼마 전 설합을 정리하다 상자 속에 들어있는 여권들을 보니 그간 참 많이도 돌아다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70~80년대 시절 일반인은 단수여권 만들기도 어려워 동남아 라도 한번 나가게 되면 보통 4~5개국은 돌아보고 와야 여행의 만족감을 느꼈으니 정말 웃기고 황당한 시대를 살지 않았나 싶다.당시 여행을 다닌 대부분 사람들도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겉할기로 돌아다녔으니 기억에 남아 있는것도 별로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학교 다닐 때부터 느낀 거지만 누구든 같이 여행을 떠나보면 그 사람의 면면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는 정설이라 본다. 가족이야 어쩔 수 없지만 동행한 상대를 배려하다 보면 내 여행의 즐거움도 잃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특별한 경우 외에는 혼자 여행을 다닐 적이 많다. 예를 들어 매일 한식 타령만 하는 친구나 수시로 회사나 집에 전화해 별일 없냐고 묻는 그런 사람들과 여행할 때는 내 마음도 조급해지고 불안했었다. 그래서 혼자 외로움을 즐기며 생각을 비워버린 자유로움 그리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볼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나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게 만들었다. 늘 그렇지만 여행이란 여러 번 가본 곳도 다시 가게 되면 새롭고 설레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언제까지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보지만 지팡이에 의지해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 그런 여행을 할 정도 라면 이미 여행의 종착역에 다 달았다는 생각이다. 나이 들어 떠난 지난 여행들은 바닥난 체력을 일으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기에 여행 중 늘 와인에 절어 지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모든 관광지를 둘러보는 건 자제하고 밤늦은 어느 한적한 골목 카페에서 들리는 파두(fado) 같은 노래 소리를 벗 삼아 술잔을 기울이다 돌아와 아침 늦게 까지 푹 잠들 수 있는 이런 여행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젠 새로운 여행지를 찾기보다는 전에 오랜 시간 머물렀어도 애착과 아쉬움이 남아 있는 곳들을 다 시들려 보는 것도 서서히 여행을 마무리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도 같기에 열정이 남아있는 한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최면을 걸어본다. 늘 가슴에 품었던 와인 성지순례 여행이었지만 떠날 수 없다면 와인 한잔하며 사진 속에서나마 지난 추억을 들춰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좋아하는 와인이 바뀌듯이 여행지 또한 때에 따라 달라지지만 산타페를 빨갛게 물들이던 노을과 산토리니 섬의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붉은 태양, 바람소리 새소리에 눈을 뜨고 골프장에서 퇴근하는 캐디들의 스쿠터 소리 등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모습들이기에 영원히 각인되어 있다. 정겹고 아련한 여행의 기억들이 꿈속에서 이어지길 바라며 잠을 청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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