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를 위하여

비가 그친 후 시선을 둘 곳.

by 생각의 인덱스

비 온 뒤 보도블록 위에는 으레 지렁이들이 흩어져 있다. 물에 잠긴 땅 속 터널에서 익사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기어 나왔으리라...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다. 지난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상식으로 통했던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틀렸다. 지렁이는 피부로 숨을 쉬고 수분에서 직접 산소를 흡수한다. 고로 물에 완전히 잠긴 상태에서도 몇 주는 거뜬히 버틸 수 있다. 물은 생존의 필수 조건, 그들의 몸이 가장 반기는 환경이다.


사실 공포보단 야망에 가까운 무언가가 녀석들을 지상 위로 끌어올린다. 평소 지렁이에게 이동이란 단단한 흙을 온몸으로 밀어내고, 삼키고, 뒤로 배설하며 겨우 몇 센티 나아가는, 그야말로 느리고 고통스러운 노동이다. 하지만 비가 내려 지표면이 흠뻑 젖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머리 위 세상은 순식간에 고속도로로 변한다. 축축한 땅 위에서라면, 지하에서 몇 달이 걸릴 거리를 단 몇 시간 만에 미끄러지듯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센트럴 랭커셔 대학 (University of Central Lancashire London) 연구진이 밝혀냈듯, 비는 지렁이에게 장거리 이주라는 드문 기회를 제공한다. 탁 트인 땅을 가로지르는 모험은 오직 표면이 젖어 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홍수를 피해 달아나는 난민으로 보았던 그 모습은, 사실 기회를 포착한 야심 찬 질주였던 셈이다.


이 반전에는 우리가 곱씹어볼 만한 무언가가 있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가 밖으로 드러나거나 이탈하는 것을 위기의 증거로 해석하곤 한다. 누군가 안정적인 직장이나 오랜 연인, 혹은 익숙한 도시를 떠날 때, 밖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은 거의 언제나 우려로 차 있다. '굴 속에서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라고. 물론 가끔은 그 말이 맞다. 하지만 때로는, 유일하게 ‘잘못된’ 것이라곤 긴 횡단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비로소 도래했다는 사실 뿐일 때가 있다. 포화 상태의 불편함, 즉 우리가 요청하지 않았던 어떤 변화로 삶이 흠뻑 젖어버리는 그 상황이야말로, 그 모든 위험과 동시 가능성을 품은 표면을 마침내 가르 지를 수 있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더 복잡해진다.


지렁이조차 자신의 상황을 항상 맞게 인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플로리다 애팔래치콜라 국유림의 소나무 숲에는 대대로 특이한 활동을 통해 생계를 이어온 가문들이 있다. 그 활동은 바로 땅에 나무 말뚝을 박고, 이를 납작한 쇠붙이로 문지르는 일이다. 말뚝이 윙윙거리면 흙이 진동하는데, 불과 몇 분 만에 수백 마리의 큼직한 지렁이들이 땅 밖으로 쏟아져 나와 숲 바닥을 뒤덮는다. 현지인들은 이를 ‘웜 그런팅(worm grunting)’이라 부르는데, 쇠가 나무를 긁을 때 나는 저음이 마치 동물이 코를 고는 소리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하지만 지렁이에게 그 소리는 전혀 다르게 들린다. 2008년 《PLOS ONE》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웜 그런팅이 만들어내는 진동은 지렁이의 가장 치명적인 천적인 동부 두더지가 땅을 팔 때 내는 진동과 거의 흡사하다. 지렁이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위협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두더지가 덮쳐오고 있다고 느껴 서둘러 지상으로 뛰쳐나오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정작 말뚝을 쥐고 있는 또 다른 포식자의 손아귀로 스스로를 내던지는 꼴을 연출하곤 한다.


이를 통해 지렁이는 비가 올 때도 올라오지만, 조작된 공포 때문에 지상으로 올라오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축축한 흙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라는 신호는 두 경우 모두 거의 동일하다.


이것이 불확실한 순간을 통과하는 우리의 방식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는 살면서 한 번쯤 발밑의 땅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울린 탓에 밖으로 나와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옛 친구에게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몹시 절박하게 느껴져서, 수년간 편안하게 유지해 온 계획을 뒤엎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알 수 없는 집단적 불안이 낮은 웅웅 거림처럼 주변을 감돌아, 모두가 거의 동시에 떠나겠다는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노출되어 낯선 빛 속에서 눈을 깜빡이기 전까지는, 우리를 움직인 진동이 비였는지 두더지였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엉뚱하게도 찰스 다윈이 등장한다.


지구 생명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이 남자는, 1870년대 후반부터 1882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의 말년을 오로지 지렁이 연구에 바쳤다.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출간한 과학 서적의 제목은 런던 지질학회 동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렁이의 활동과 분변토의 형성》. 1837년 그가 처음 이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을 때엔, 동료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소박한 주제였다. 하지만 다윈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영국 땅 1 에이커당 5만 마리가 넘는 지렁이가 살고 있으며, 이들이 흙을 삼켜 소화한 뒤 알갱이 단위로 표면에 배설하는 과정을 해마다 반복한다는 사실을 계산해 냈다. 그리고 수세기에 걸쳐 이 지렁이들이 로마의 유적을 파묻고, 스톤헨지의 거석들을 땅속 깊이 가라앉혔으며, 영국 농업이 의존하는 표토층 자체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출간 첫 몇 주 만에 《종의 기원》보다 더 많이 팔렸다(!) 그리고 그 책의 핵심 주장은 다윈이 평생 해왔던 이야기와 맞닿아 있었다. 너무 작아서 눈치채기 힘들고 너무 하찮아서 존중받지 못하는 행위자들의 반복된 행동이,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눈에 보이는 전 세계를 다시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는 심지어 스톤헨지까지 두 시간이나 여행해 거석들이 지렁이가 만든 흙 속으로 얼마나 가라앉았는지를 측정하기도 했다. 그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라. 죽음을 몇 달 앞둔 노인이, 고대인들이 무언가 성스러운 것을 표시하기 위해 평원을 가로질러 끌고 온 거석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지렁이들이 그 돌을 얼마나 깊이 끌어내렸는지를 재고 있는 모습을. 거대하고 경이로은 것이 평범하고 하찮은 것에 의해 조금씩 삼켜지는 과정. 이 광경엔 거의 코미디에 가까운 하찮음과 동시에, 아주 진지한 메시지도 담겨 있다. 당신이 딛고 서 있는 땅은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생명체들이 아래에서부터 끊임없이 땅을 다시 만들고 있으며, 그들은 어떤 기념비보다 더 오랫동안 그 일을 해왔다는 것. 그런데도 그 땅은 여전히 당신을 지탱해주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다윈이 지렁이에 대해 이해했던 것은 그가 평생 모든 것에 대해 이해하려고 했던 것과 같았다. 세상은 바닥에서부터, 간과된 존재들에 의해, 한 사람의 생애로는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느린 움직임으로 쓰인다는 사실이다. 내 생각에 그의 지렁이 책이 그토록 많이 팔린 이유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오랫동안 갈구해 온 어떤 긍정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렁이의 끈기 있고 보이지 않는 노동이 잉글랜드의 들판을 만들 수 있다면, 어쩌면 평범한 삶의 목격자 없는 노동—매일 아침 다시 표면 아래로 돌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흙을 천천히 뒤집는 그 모든 일—도 누군가가 말해준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는 위로 말이다.


이 이야기는 결국, 다시 비 온 뒤의 보도블록으로 돌아온다. 콘크리트 위에 난파된 지렁이는 지금 진짜 위기에 처해 있다. 빛과 질감에 방향 감각을 잃었고, 태양이 지표면을 말려 숨 쉬는 데 필요한 수분을 앗아가기 전, 흙으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여 꿈틀거리고 있다. 물론 지렁이가 표면으로 올라온 건 실수가 아니었다. 기회는 진짜 존재했으니 말이다. 머리 위의 젖은 땅은 몇 시간 동안만큼은 건너가 볼 가치가 있는 세상이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흙과 하늘 사이 어딘가에서 녀석은 진화적으로 전혀 대비하지 못한 표면인 포장도로에 부딪혔고, 해방의 꿈은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곳에서 멈춰버렸다.


우리는 그곳을 안다. 우리 모두 살면서 한 번쯤은 터널을 뚫고 나온 삶과 건너가려던 삶 사이, 내가 결코 견디도록 지어지지 않은 표면 위에 갇혀 땅이 다시 부드러워지기를 기다려본 적이 있다. 그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실패자로 여기고, 표면으로 올라온 것 자체가 실수였다고 믿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리고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우리가 굴 속에서 얌전히 견뎌야 했을 위기의 희생양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보도블록 위의 지렁이는 어딘가로 가려던 중이었다. 녀석은 부력을 감지했고, 그것을 드문 기회로 정확히 읽어냈다. 엉뚱한 장소에 다다랐다는 사실이 지렁이가 틀렸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세상이, 그 어떤 지렁이도 예측할 수 없었을 만큼 수많은 교차로를 포장해 버린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녀석이 지하에서 이미 해낸 노동, 어두운 흙을 통과하며 쌓은 수십 년의 성과는 지렁이가 길거리로 나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윈이 포착한 건 바로 그것이다. 언뜻 보기엔 인과가 불분명한 사건들로 빚어진 알갱이 하나하나가 모여 들판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