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내가 많이 좋아했던 장인어른이 소천하신 지 1년이 넘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누구나 죽고, 혼자 죽고, 빈손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지인과 함께 처가에 왔다. 장모님께서 장인어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신다. 장인어른의 빈자리가 너무 크기에 사위를 보니 또 생각이 나는 듯하다. 아직도 장모님은 기승전결 장인어른 살아생전의 말씀이다.
장인어른은 2023.8.15일 76세 젊은 나이(?)에 간경화가 발전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법 없이도 산다'라는 표현을 쓴다면 이 분에게 가능한 문장이다. 장인은 월남참전 유공자다. 간경화를 앓고 계셨지만 꾸준히 보훈처에서 지정한 병원에 다니고 있었고 의사 선생님도 농담으로 술을 드셔도 될 만큼 좋아지셨다고 하였다. 그런데 시골에서 농사일과 취미로 그라운드 골프를 하시는데 힘이 없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다니시던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간에 이상 징후가 있으니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있으셨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S병원에 검진을 받으셨고 검진 결과를 설명해 주시는 의사 선생님께서 간암 3기 이기는 하지만 전이가 되지 않아 잘 치료하면 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병원이고, 장인어른의 주치의는 암과 관련하여 권위가 있는 대단한 분이셨다. 간에 붙어 있는 작은 암 덩어리를 제거하기 위해 S병원에서 시술을 했고 시술이 잘 되었다고 하셨고 잘 드시면서 잘 쉬고, 치료에 전념하면 완쾌될 수 있다는 말씀까지 하셔서 우리 가족들은 모두 안도했다
우리 집에 계시면서 열 번의 방사선 치료를 받으셨다. 방사선 치료로 인해 기운은 없고 식사를 하시는데 조금은 힘들어하셨지만 잘 치료가 되는 것 같아 걱정은 하지 않았다. 방사선 치료 후 건강이 회복되면 항암치료받자고 했다. 주치의가 말한 날짜에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항암 1차 치료 후 다음 항암치료는 3주 후에 있기 때문에 시골 본가로 장인어른을 모셔다 드렸다. 갑작스럽게 서울에 있는 병원을 오게 되셔서 농사일 등 걱정이 많이 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만류를 드렸지만 맑은 공기가 있는 익숙한 곳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항암치료 후유증인지 그 후 복수가 차고 폐렴으로 발병 3개월도 못 되어 소천하셨다. 나보다도 훨씬 더 건강했던 분이셨기에, 그리고 의사의 소견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하였기에 걱정을 하지 않던 우리 가족 모두는 당황스러웠고 그 상황을 받아 드리기가 쉽지는 않았다. 당연히 우리보다는 장모님의 상심이 크셨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고 1년이 지났지만 장모님은 아직도 많이 힘들어하신다. 힘들어하시는 걸 알기에 장모님과 이야기도 나눌 겸, 감을 따주겠다는 핑계로 지인과 함께 방문한 것이다. 올해만 해도 장인 생일날과 1주기 추모 행사 시에도 내려왔다. 우리 처가는 전남 신안군 비금면에 있는 섬이다. 한 번 내려오려면 자동차로 5시간 이상 운전해야 하고 선착장에 도착하여 최소 1시간쯤 기다리다 배에 오르고 40분쯤 배로 이동해야만 처가가 있는 섬에 다다르게 된다. 지금도 서울에서 8시간 이상 걸린다. 결혼 후 30여 년을 1년에 한두 번 이상은 다녀왔다. 예전에 도로나 배편이 좋지 않을 때는 무려 44시간 걸린 적도 있다. 아마도 2018년 설을 쇠기 위해 내려갈 때인 것 같다. 눈이 너무 많이 왔고 갑작스러운 폭설이라 제설작업에도 한계가 있었다.
혼자 계시는 장모님을 뵈니 마음이 많이 아프다. 장인어른을 지우기 위해 집을 전면 수리 했지만 곳곳에 묻어 있는 장인의 체취를 다 지우는 것은 역부족이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장인어른 말씀 중 눈물을 보인다. 나는 전에도 노인 문제나 죽는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장인어른의 소천 후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웰다잉 공부를 하면서 이런 글을 봤다. '가족 또는 친구 등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엄청난 상실감이 찾아온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즐거움이나 바쁨에 매몰되거나, 일부러 사람들 관계로 시선을 돌리는 방법도 있지만 상실감은 다른 무언가로 대체한다고 해서 잊히지는 않는다. 충분히 애도하고 그 감정과 조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단계를 극복해야만 참된 행복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라고 한다.
장인어른의 빈자리를 장모님은 TV시청으로 시간을 보내시고, 주무시다가 잠에서 깨는 날이면 밤새 집안 청소를 하신다고 한다.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에도 TV 이를 밤새 틀어 놓고 주무셨다. 소천하신 직전에 비하면 많이 안정되셨지만 여전히 힘들어하신다. 사위인 나도 처가에 오면 장인어른의 다정다감하셨던 모습들이 이곳저곳에서 보여, 보고 싶은데 장모님은 얼마나 그리울까를 생각하니 왠지 장모님의 눈시울을 따라 나도 불거진다. 코로나 막바지 기는 했지만 코로나 검사를 하는 사람만이 병간호를 전담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장인어른이 병환으로 밤새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소천하는 그 순간까지 다 마치지 못한 농사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섬망증세를 통해 표현을 하곤 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다.
장인어른처럼, 아니 나를 포함한 장인어른의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의 황망함이란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게 될지 모르지만 누구나 다 죽는다는 사실은 알기에 하루하루가 참 감사하고 귀하다. 라틴어 중에 이런 단어들을 좋아한다. 죽음을 생각하라는 뜻의 ‘메멘트 모리’, 현재에 충실하라는 뜻의 ‘카르페 디엠’,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아모르파티’ 다른 듯하지만 모두 같은 단어로 보이는 이유는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