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팬, 법정에 서다

제18화 후크 선장의 토끼풀 농장(2)

by 임재도

임재도 작가의 법률감성소설

피터 팬, 법정에 서다

존엄사법이 제정되지 않아 살인범이 된 어느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간병과 사랑이야기






제18화 후크 선장의 토끼풀 농장(2)



우리는 난실 안으로 들어섰다. 천장에 포개어 덮은 비닐과 보온 담요 및 검은 차양은 낡아서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말간 하늘이 보였고, 농사용의 두꺼운 담요를 깔아 놓은 통로 바닥에는 고사리 같은 양치류 식물이 띄엄띄엄 무더기로 자라 있었다. 양치류가 아닌 몇몇 이름 모를 잡초는 차양 그늘 때문에 웃자라 끝이 천장에까지 닿아 있었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폭 2m, 길이 10m 정도의 평상처럼 만들어진 허리 높이의 나무틀 진열대 4개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다. 화분은 밑이 뚫린 이 진열대에 세로로 촘촘하게 지른 각목 사이 공간에 화분귀가 걸려 진열되어 있었다. 큰 타원형 받침대 위에 수석에 버금가는 돌과 고목의 뿌리에 붙인 풍란이나 석곡 등 석부작과 목부작도 있었다. 이에 비하면 원장이 옥상정원 유리 온실에서 키우고 있는 난은 오히려 초라하다 할 만했다. 후크 선장의 집에 토끼풀이 가득 있다는 존과 마이클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러나 화분에 있는 난이나 석부작, 목부작의 난들은 이미 바짝 말라죽어 있었다. 화분이 바닥에 떨어져 깨어진 채로 말라죽은 것들도 많이 있었다. 거의 모든 화분의 가장자리에는 하얀 팻말 이름표가 꽂혀 있고, 그 팻말에는 중투, 중압, 단엽, 소심, 복륜, 주금화, 자화, 황화, 복색화, 호, 서반 같은 난의 특징을 나타내는 다양한 이름 아래 그 난을 채집한 연월일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깨어진 화분에도 팻말이 함께 뒹굴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소년의 아버지 또한 원장과 마찬가지로 난에 대하여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소년의 아버지 후크 선장은 누구 못지않은 자생춘란 전문가였을지도 몰랐다. 이 난실의 난들은 그가 어렵게 채집하여 정성을 다해 키운 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난은 그의 사고와 더불어 관리는 고사하고 물조차 주지 않아 모두 말라죽어 버린 것이었다.


그것을 보는 원장이 연신 땅이 꺼질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난에 대하여 전문가 수준의 식견과 미감을 가진 원장의 눈에는 팻말에 적혀 있는 난의 이름과 죽어버린 잎의 형태와 무늬만으로도 그 난들이 얼마만 한 가치를 가진 것인지 짐작하는 것 같았다. 오랜 가뭄에 바싹 말라버린 새싹 같은 난을 하나하나 점검하듯 바라보면서 원장은 애끓는 탄식만 푹푹 내쉬었다. 난 애호가인 원장으로서는 정말 애통하다 못해 절통한 일이 눈앞에 벌어져 있었다.


― 원장님, 이 죽은 난초들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원무과장이 원장의 억하심정은 헤아리지 못하고 눈치 없이 물었다. 원장이 화를 참지 못하고 원무과장에게 내뱉듯이 고함을 쳤다.


― 아니, 원무과장은 이 집에 몇 번이나 왔다 갔었다면서 여기에 이런 난이 있다는 걸 몰랐단 말인가? 이 난만 살아있어도 병원비 걱정은 전혀 안 해도 될 텐데. 아니, 병원비가 뭔가. 10억? 20억? 아이고, 이 희귀 명품들의 가격을 어떻게 매길 수 있을까? 여기 있는 이 중투호, 이 단엽품 하나만 하더라도 아마 천만 원대는 호가할 걸세.


원장이 눈을 희번덕이며 화풀이하듯 내지르는 소리에 원무과장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만 쩍 벌리고 서 있었다. 그러나 원장의 절통한 한숨과 화풀이가 이미 죽어 버린 난을 되살려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아무 소득 없이 난실을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씩씩대는 원장을 따라 원무과장이 고개를 숙이고 먼저 난실을 나가고 마지막으로 내가 뒤따라 나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난실 안을 빙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뚫어진 천장 한 곳을 투과한 한 줄기 햇살이 구석진 왼쪽 모서리에 레이저 광선처럼 내리 꽂히고 있었다. 차양에 가려 응달진 곳이지만, 뚫어진 천장을 통하여 햇볕이 그곳에까지 닿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빛에 눈이 부셨다. 아마 찰나의 환영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빛 속에서 응당 병원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후크 선장의 모습을 보았다. 후크 선장은 파란 플라스틱 물뿌리개로 구석진 그 자리에 물을 주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후크 선장의 환영을 지워 버리고 부신 눈을 가늘게 떴다. 순간 그 모서리에 자라난 고사리 같은 양치류 식물 더미 속에서 누렇게 쭉 뻗어 있는 풀잎 가닥들이 보였다. 예사롭지 않았다.


― 원장님, 저것도 난이 아닙니까?


내가 원장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원장이 발을 멈추고 뒤돌아 왔다.


― 저기를 한 번 보십시오.

― 어디?


내가 모서리에 나 있는 풀잎 가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원장의 시선이 내 손끝을 따라왔다.


― 아니, 저것은?


원장이 말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곳으로 갔다. 나도 원장을 따라갔다. 그 모서리에는 난석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난석 위에 귀가 깨어져 나간 투박한 화분 두 개가 허리와 발이 동강 난 채 너부러져 있었다. 난석 아래에서 자라난 음지 양치식물이 수북하게 웃자라 있는 가운데 그 양치식물과 선명하게 구별되는 누른 풀잎 가닥들이 힘차게 위로 쭉 뻗어 솟아 있었다. 난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내가 얼핏 보아도 그것이 단순한 풀잎이 아니라는 것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난이었다. 비닐하우스의 구석진 모서리에 갇힌 채 비바람도 맞지 않아 잎의 형태나 무늬도 티끌 하나 없이 튼실하고 깨끗했다. 아마 우리보다 먼저 이 난실에 들어왔던 누군가가 이미 말라죽은 것으로 알고 진열대에 걸려 있던 난 화분을 화분째로 그곳 모서리로 던져 버렸고, 이렇게 방치된 난이 뚫어진 천장에서 내린 빗물과 바닥의 습기를 먹고 다시 살아난 모양이었다.


다른 난처럼 이 난도 진열대 위에 걸려 있었다면 말라죽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인데, 하늘이 이 난을 살려낸 모양이었다. 그 난을 바라보는 원장의 동공이 등잔만 해지고, 입에서는 연방 아아,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원장이 주변의 웃자라 난 양치식물과 난석을 조심스럽게 걷어 내고 난을 채집했다. 행여 뿌리 하나라도 다칠까 봐 원장의 손길은 마치 정교한 수술을 하는 외과의사의 손길처럼 더없이 조심스러웠다. 난은 두 포기였고, 각 포기는 세 촉이었다. 원장은 이 난을 진열대 위에 놓인 빈 화분 ― 이 화분은 다른 화분에 비해 유난히 투박하고 볼품없어 보였다. 원장은 이 화분을 통풍이 잘되도록 초벌구이만 한 낙소분이라고 했다 ― 두 개에 포기 별로 따로 심었다.


나는 원장이 화분에 심어 놓은 그 난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밑동에서부터 잎이 노랗게 물들어 위로 뻗어가면서 중앙은 노랗고 가장자리는 파랗게 테두리가 쳐진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특이한 것은 중앙의 노란 무늬에 밑동 1cm 지점쯤에서 시작하여 대나무 마디처럼 생긴 흑갈색의 무늬가 규칙적인 간격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난에 문외한인 내가 얼핏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형태와 품격을 나타내고 있었다.


원장이 신주 모시듯 조심스럽게 화분을 안고 나왔다. 원장은 얼마나 흥분했는지,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우러르며 다시 한번 아아, 하는 감탄사를 발하며 상체까지 부르르 떨었다. 원장은 이제 낚시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낚시장비는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원무과장에게 바로 전속 낚싯배 한 척을 대절하라고 시켰다. 원무과장이 휴대전화로 단골로 이용하는 낚싯배를 불렀다. 우리는 여객선 선착장이 아닌 토끼머리 바위 해안까지 온 그 낚싯배를 타고 서둘러 토끼섬을 나왔다. 물론 바닷물에 낚싯대 한 번 담가 보지도 못한 채였다.


그러나 정말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일은 그로부터 2주일이 지나서 일어났다. 토요일 그날 밤, 저녁을 먹은 후 아파트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혼자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아내가 들어와 TV 방송에 원장이 출연했으니 한번 보라고 했다.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원장이 나왔다는 말에 나는 아내를 따라 거실로 나왔다. 그 프로그램은 창성시 지방방송국이 자체 제작한 대담 프로였다.


도내의 지방 명사들과 그들이 개인적으로 아끼는 골동품이나 특별한 소장품을 함께 소개하는 지역문화 프로그램이었다. 도내에서 행세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특별한 소장품을 갖고 출연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와 그 소장품이 진품인지 아닌지를 감정하고 가격을 매겨 보는 <진품명품>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촬영 장소는 의외로 방송국의 스튜디오도 병원도 아닌 원장의 개인 아파트 거실이었다. 진행자인 여자 아나운서가 배경 없는 화면에 먼저 나와 원장의 프로필과 함께 원장을 소개했다. 그러고는 원장의 아파트 거실 소파에 앉은 진행자와 원장 사이에 창성시에서의 의료사업을 통한 원장의 희생적인 지역의료 봉사활동 운운하는 인사치레 덕담이 오고 갔다. 그것은 돈벌이에 철저한 원장의 간접광고 영업전략이었다. 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진행자가 원장이 특별히 아끼는 소장품을 소개했다. 화면에 나온 것은 미니 온실처럼 생긴 직육면체 장치 안에 들어 있는 난 화분 하나였다. 난이 들어 있는 그 직육면체 장치는 온도와 습도는 물론이고 항균 및 자동 통풍기능까지 갖추고 있는 특수한 난 배양 장치라고 원장이 직접 부연 설명했다. 그 특수 장치의 값만도 상당하다고 했다.


이 난의 감정을 위하여 한국자생란협회 회장이라는 사람과 그 비슷한 명칭의 이사라는 사람, 그리고 평생 우리 춘란 연구에만 전념하고 있다는 백발의 농학박사 한 사람이 나왔다. 진행자의 질문에 따라 원장과 이들 세 사람 사이에 그들의 고상한(?) 취미 생활인 난에 대한 대담이 시작되었다. 한국 춘란이 일본 난이나 중국 난에 비해 예술적 가치에서 우수한 점, 우리 춘란의 특징에 따른 명칭 등이 소개되고, 그 대담과 관련된 난 사진이 화면에 소개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원장이 가장 아끼는 소장품이라는, 특수 장치 안에 든 난이 큰 화면으로 나타났다. 순간 나는 그 난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것은 분명 2주일 전 토끼섬의 후크 선장 난실에서 가져온 그 난이었다. 다만 그때 토끼섬에서 임시로 심은 투박한 낙소분이 아니라, 승천하는 용의 무늬가 상감기법으로 새겨진 고급 도자기 같은 사기 화분에 옮겨 심어진 것만 달랐다.


감정을 위하여 나온 세 사람은 하나같이 밑동에서부터 중투로 솟아오른 잎의 장엄한 기세와 푸른 중압호의 절제미, 중투에 새겨진 대나무 마디 무늬의 고절한 품격 운운하면서, 그 난은 가히 최고 명품 중의 명품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고는 가격을 묻는 진행자의 마지막 질문에, 만약 그 난이 경매에 붙여진다면 응찰가는 최소 억대가 넘는 금액부터 출발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만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처음 그 난을 보고 흥분하여 연방 감탄사를 내지르던 원장의 태도를 이해할 만했다. TV에 소개된 그 난 화분 외에도 같은 난 화분 하나가 또 있으니, 원장은 후크 선장의 난실에서 최소 2억 원이 넘는 초고가의 명품 난을 절취한 절도범이고, 그 공범은 바로 나였다. 그러나 그 공범은 고가의 장물에 묻은 떡고물 하나도 챙기지 못한 전혀 실속 없는 공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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