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팬, 법정에 서다

제19화 후크 선장의 비밀 일기장

by 임재도

임재도 작가의 법률감성소설

피터 팬, 법정에 서다

존엄사법이 제정되지 않아 살인범이 된 어느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간병과 사랑이야기






제19화 후크 선장의 비밀 일기장


― 어젯밤 아버지는 좀 어떠셨니?

― 선생님, 눈을 떴어요. 시계소리를 들은 아빠가 한참 동안 눈을 뜨고 절 바라봤어요.


소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 그래, 다행이구나.

― 내일 아침 ‘따르르릉’ 소리를 들으면 아빠가 말을 할지도 몰라요.


소년은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내일이면 저렇게 빛나는 눈은 한층 더 짙은 절망의 눈빛으로 변할 것이다. 그런데 다음 날, 소년이 깜짝 놀랄 말을 했다.


― 선생님, 어젯밤 아빠가 말을 했어요.

― 뭐라고? 정말이야?

― 예. 분명히 말을 했어요.

― 그럴 리가 있니?

― 입으로는 하지 않았는데, 눈으로 말을 했어요.


그러면 그렇지. 말을 했다는 소년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래도 혹시 모른다고 은근히 기대했던 나는 눈으로 말을 했다는 말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 그래, 눈으로 말했다고? 정말 다행이구나. 그런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아니?

― 아빠는 언젠가 바다의 말은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다고 했어요. 마음을 모으면 느낌이 열리고, 느낌이 열리면 눈이 열린다고 했어요.

― 그것은 아버지가 그냥 해본 소리란다.

― 아니에요. 어젯밤 아빠의 이 말을 생각하고 마음을 모아 봤어요. 그랬더니 아빠가 제게 눈으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어요.

― 그래? 아버지가 어떤 말을 했는데?

― 가자고 했어요. 바다로 가서, 함께 해적놀이하자고 했어요.


― 움직이지도 못하시는 아버지가 어떻게 해적놀이를 한단 말이냐?

― 바다만 있으면 돼요. 바다만 있으면 움직이지 못해도 해적놀이를 할 수 있대요. 아빠가 말했어요. 이제는 알 수 있어요. 느낌으로 눈이 열린다는 말, 제가 크면 이 말을 이해하게 될 거라는 아빠의 말을 이제 알게 되었어요. 이제 집으로 보내 주세요. 아빠가, 바다가 있는 집으로 가자고 했어요.

― 안 된다. 어머니가 오기까지는 안 돼. 어머니도 없는데 아버지를 내보내면 내가 처벌받게 돼.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다. 소년의 기대와는 달리 환자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김 과장과 마찬가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소년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 선생님, 빨리 오세요. 환자가 위급해요.


일반병동 외래 진료실에서 막 진료를 마치고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에 이 간호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나는 부리나케 특별병동으로 갔다. 이제까지는 자가호흡을 하던 환자의 상태가 위독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빨리 심폐소생술 준비해.


다행히 응급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후 환자는 정상을 되찾았다. 이제는 자가호흡에 의존할 수만은 없었다. 언제든지 위급한 상황은 찾아올 수 있었다. 응급상황을 겨우 모면하고 산소호흡기를 꽂은 환자의 상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났을 때, 나는 소년에게 물었다.


― 아버지의 상태가 왜 갑자기 나빠졌을까?


그것은 소년에게 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내가 나에게 하는 자문이었다.


― 시계 모두를 한꺼번에 ‘따르르릉’하고 울리게 했어요. 그렇게 하면 아버지가 깨어날 것 같았어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본 소년이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쓴웃음 대신 콧날이 시큰해졌다. 물론 환자가 갑자기 위독하게 된 원인이 딱히 시계소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며칠 전부터 환자의 예후는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요란한 시계소리가 의식불명 환자의 뇌에 충격을 주어 응급상황이 초래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소년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 그래? 아마 아빠가 좀 놀라신 것 같구나. 이제 그 시계는 그만 울리자.


나는 소년의 어깨를 꼭 안으며 말했다. 소년이 종내에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소년이 결국 뚝뚝 흐르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 냈다. 나는 소년의 어깨를 다독이며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그때 환자의 침대 위에 펼쳐져 있는 대학노트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대학노트 여러 권을 책처럼 묶은 것인데 제법 두툼했다. 혹시? 문득 김 과장이 말하던 환자의 비망록이 생각났다.


나는 포옹을 풀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내 예상대로 그것은 소년의 아버지의 비망록이었다. 아마 소년이 밤새 아버지의 머리맡에 앉아 그것을 읽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김 과장이 비망록을 얘기했지만, 그때까지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 이것은? 아버지가 쓴 노트구나.

― 예.

― 내가 좀 보면 안 될까? 나중에 돌려주마.


소년이 눈물을 거두고 마치 제 일기를 남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쑥스러운 표정으로 대답 대신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그 노트를 들고 진료실로 내려와 첫 페이지를 펼쳤다. 직접 수기로 적은 글씨체는 붓글씨처럼 단정하고 품위가 있었다. 비망록은 소년의 아버지가 서울 생활을 접고 섬으로 돌아온 날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오늘 나는 이제까지의 서울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곳은 내 마음의 안식처이자 내 영혼의 쉼터이다. 나는 내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오늘부터 이곳에서의 내 삶을 기록할 것이다. 이 기록은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문명이란 사실 불필요한 생필품을 끝없이 늘려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 도시인의 생활이 정말 그렇지 않은가. 그들은 끝없이 새로운 물질을 추구한다. 그 새로운 것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필요한 것이 아니면서도 남보다 우월해지고 싶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시당하고 소외당한다는 느낌 때문에, 본질은 보지 못하고 끝없이 새로운 물질을 추구한다. 이것이 현대의 도시 생활이다. 이러한 생활이 과연 옳은 것인가?


거의 모든 사람이 소유, 즉 돈벌이를 위하여 악착같이 살아가는데, 유독 나만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이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내가 염세주의자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나는 누구나가 추구하는 편리하고 안일한 문명 생활을 거부하고, 스스로 이 섬에 들어와 유배 생활을 선택한 어리석은 바보인가? 옛날 이 섬이 유배의 섬이었다고 하는데, 나는 자청하여 절해고도 유배의 길을 택한 것은 아닌가? 자문해 본다.


아니다. 나는 과거 내 직장의 업무에서도, 소유를 위한 타인과의 경쟁에서도 패배한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패배주의자로서 도피한 것이 아니라, 내가 꿈꾸는 내면의 삶과 이상을 실현하고자 내 섬을, 내 바다를 선택한 것이다. 강요에 의한 유배 생활이 아니라, 내면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관점에서 지금까지의 내 삶을 정리하고 극복하고 싶은 것이다.


문명과는 다소 떨어져 있지만, 자연과 동화된 조화로움 안에서 영혼의 소리에 순응하며 사는 창조적인 삶,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내 삶의 모습이다. 이런 내 삶의 형식이 경쟁과 소유 생활에 지친 사람들의 척박한 가슴에 한 그루 행복나무가 자라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 내 고향인 이 섬을 우리 가슴속 행복나무가 자라는 영혼의 낙원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나는 이 섬을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사람들의 황폐한 욕망을 절제하고 그 정신을 구원하는 구원의 섬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나는 이 섬을 경쟁으로 지쳐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의 불안과 긴장을 해소하는 행복의 섬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나는 이 섬을 누군가로부터 상처받은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하는 치유의 섬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내가 못 이루면 내 아들에게 이 꿈을 물려줄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시간을 방황과 망설임 속에서 보냈다. 이제 더 이상 내게 필요하지도 않은 가식적인 물질적 소유를 위한 소모적인 경쟁과 갈등으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지금 당장, 시들어 가는 우리 가슴속 행복나무에 물을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누구나의 가슴속에서 이 행복나무가 튼실한 뿌리를 내려 무성하게 자랄 때까지 소중하게 가꾸고 키워 나가야 한다.


아내에게는 미안하다. 아내는 낯설고 생소한 이곳의 환경과 앞으로의 생활이 못내 불안하고 못마땅한 눈치다. 그러나 아내도 머지않아 내 꿈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내 생각과 비전을 공유하며 우리 가슴속 행복나무를 함께 가꾸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는다. 아내를 향한 내 사랑의 힘이, 내 영혼의 원력(原力)이 지금의 시련을 극복하게 해 줄 것이다.



글에 빠져 있는 동안에 어느덧 퇴근시간이 되어 있었다. 비망록의 글은 읽어 갈수록 이상하게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퇴근했다. 주말 동안 집에서 차근차근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먹은 후 나는 다시 글에 빠져들었다. 일기 형식의 글은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참다운 행복에 이르는 기본 가치란 어떤 것일까? 지금까지 우리의 생활을 지배해 온 물질문명이라는 것이 그 문명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준 적이 있는가? 지금 그들이 행복이라고 느끼는 것이 과연 참다운 행복인가?


내 영혼은 아니라고 한다. 그 행복은 탐욕에서 비롯되고, 심지어 남을 착취하여 얻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 착취로 얻은 것을 그들의 부로 저장한다. 그러나 그 저장된 부가 행복을 가져다주었는가? 그들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그들은 불안과 긴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불안과 긴장의 토대 위에 쌓은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나는 오직 먹고사는 일, 나아가 부를 쌓는 일에서 벗어나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일에 몰두하고, 내가 관계하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열린 관계를 맺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참다운 행복이다.


나는 이곳에서 참다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보고 싶다. 내가 소망하는 이 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것은 소박한 꿈이면서도 현대 문명 생활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커다란 비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몸의 모든 세포는, 나아가 내 영혼은 이러한 커다란 비전 앞에서 전율한다. 나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나는 다시 페이지를 성큼 건너뛰어 한 페이지를 읽어 보았다.



거죽의 비순수함과 위선을 벗어던지고 본래의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그리고 더없이 단순한 생각과 소박한 삶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그 문명은 아직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삶의 중요함’에서 언급된 임어당 선생의 글이다. 나는 자문해 본다. 내가 이 섬에서 살고자 하는 삶의 방식은 오히려 위선이 아닌가? 소박한 삶, 현실이 아닌 철학이나 문학에서나 인용될 ‘완성된 문명’을 추구한다는 그럴듯한 핑계로 나는 도피한 것이 아닌가? 도시 생활의 경쟁에서 자신이 없으니까, 내 나름의 독선적 명분으로 나를 가두어 버린 것은 아닌가?


그러나 내가 이 섬에서 살아야 할 이유와 근거는 명확하다. 나는 이제 다시는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내 삶은 누구로부터도 주목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조롱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다. 속박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의 장애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내 생각에 공감하지 못하는 아내가 안타깝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다. 내가 정한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묵묵히 나아가는 것, 이것이 행복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다. 나는 사랑으로 아내를 설득할 것이다.



또 다른 글.



문명과의 단절, 나는 무엇으로 소통해야 하나? 아니, 누구와 어떤 대상과 소통해야 하나? 그러나 나에게는 문명보다 더 근원적인 생명 에너지를 품고 있는 바다와 하늘이 있다. 나는 매일 아침 바다에서 떠오르는 장엄한 태양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다. 나는 일출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이 명상을 통하여 수평선 너머 더 넓은 세계와 소통하고 바닷속 수많은 생명체와 교류할 것이다. 하늘의 별을 통하여 저 광대한 우주와 소통할 것이다.



노트의 중간쯤에 있는 또 다른 글.



내가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 그것은 소유를 위한 물질문명을 기반으로 한 경쟁사회(競爭社會)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문명에 바탕을 둔 경존사회(競存社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공동체 구성원의 인격적 존엄성이 최우선 가치로 존중받는 영성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먼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조화로운 사람들의 소박하고 원시적인 형태로 출발할 것이다. 이 섬에서 말이다. 나는 확신한다. 이 작은 섬에서 시작된 영성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파동은 점점 확대될 것이다. 나는 이 작은 섬에서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함께 어울려 노는 해적놀이를 통하여 그 가능성을 보았다.



노트 후반부에 이어지는 글.



내가 꿈꾸는 영성공동체를 어떤 방법으로 실현할 것인가. 우선 경제적 자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행히 이 섬은 도시 근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입지적 조건과 천혜의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자연경관을 이 섬의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여 자립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나는 먼저 이 섬 전체를 하나의 자연식물원으로 조성할 것이다. 이 섬에서 자라는 토착 식물은 물론 이곳의 자연적인 기후조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열대식물과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식물의 종류를 가능한 한 많이 심어 이 섬 전체를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꿀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섬이 하나의 살아 있는 식물도감이 되도록 할 것이다. 이 하나만으로도 이 섬은 꽃과 숲이 어우러진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 나날이 오염되어 가는 이곳 바다를 보존하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나는 이를 위하여 이곳 바다를 하나의 자연수족관으로 만들 생각이다. 이 섬에 오면 우리나라의 연근해 어류는 물론 세계의 수많은 어종과 다양한 해저식물까지 볼 수 있는 자연수족관을 만들 것이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룰 수는 없는 일, 나는 지금 당면한 첫 번째 목표부터 이루기 위하여 내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한다. 여전히 내 뜻에 공감하지 못하는 아내가 안타깝다. 그리고 미안하다. 하루빨리 아내가 내 뜻에 공감하고 내 비전을 공유하는 날이 오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나는 주말 이틀 동안 꼬박 그 비망록에 빠져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가 도시 생활을 접고 작은 섬으로 들어오기까지의 고뇌와 미래의 소망이 깨알처럼 박혀 있었다. 그것은 현대 문명에 대한 문명비평서였고, 새로운 문명관을 제시하는 하나의 사상서일 수도 있었다. 환자가 단순한 어부가 아니었다는 김 과장의 말을 공감할 수 있었다.


그 비망록이 비록 논리 정연한 사회과학 서적이나 논문은 아닐지라도, 그 속에는 글쓴이의 사유와 고민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었다. 스스로 이 사회와 고립되어 절해고도 유배의 삶을 선택한 안타까운 고뇌가 짙게 담겨 있었다. 동행을 거부하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 그러나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갈등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런 유형의 사유나 글은 사실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비망록은 자신의 비전을 실현할 구체적인 방안까지 적시한 실용서이기도 했다. 비망록 중간중간마다 그 섬에 있는 기암괴석이나 토끼머리 바위에 석부 분재처럼 서 있는 특이한 수형(樹形)의 소나무 등 특정한 대상이나 풍경을 찍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사진 아래에는 <토끼눈 숲>, <토끼꼬리 해안>, <네버랜드 탐망대>, <달맞이 눈꽃 동산>, <해적선 정박지> 등 동화적인 이름과 그 이유 및 그것을 관광 자원화하기 위한 실제적인 방안이 붉은 볼펜 글씨로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비망록 본문 뒤에 A4 용지를 덧붙여 놓은 부록에는 <해양생태공원>, <자생식물원>, <힐링 명상센터>, <자생난 배양재배실> 등의 이름을 붙인 스케치로 그린 건물의 조감도가 붙어 있고, 그 아래에는 이런 건물의 용도와 기능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특히 <자생난 배양재배실>이라고 적혀 있는 A4 용지에는 검은 차양을 친 비닐하우스 한 동의 외관과 난실 내부의 전경을 찍은 사진이 붙어 있고, 그 난실에서 재배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난 화분 사진이 여러 장 붙어 있었다.


물론 이 사진은 원장과 함께 토끼섬에 가서 본 후크 선장의 비닐하우스 난실과 그 안에서 키우던 난 화분의 모습이었다. 컬러 사진 속의 그 난들은 하나같이 잎에 특이한 무늬나 테두리가 둘러쳐져 있거나 꽃의 색깔이나 형태가 색달랐다. 이 난과 관련하여 중간쯤에 끼워진 두 개의 난 화분 사진은 특히 시선을 끌었다. 이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원장이 가져간 억대를 호가한다는 그 난의 사진이 분명했다.


중앙의 노란 바탕과 가장자리의 파란 테두리, 중앙의 노란 무늬에 가로로 새겨진 흑갈색의 대나무 무늬 반(斑), 이것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다만 한 포기가 3촉으로 되어 있던 원장의 난과는 달리 유일하게 자라 있는 한 촉의 밑동에서 죽순처럼 노랗게 솟아나고 있는 또 다른 한 촉의 새싹이 동해의 심연에서 막 떠오르는 태양처럼 장엄한 기상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난을 채집한 후 찍은 첫해의 사진인 것 같았다. 이 난이 요행으로 난실 모서리에 버려진 후에 각 포기에서 다시 두 촉의 신아(新芽)를 틔워 우리가 난실에 갔을 때는 원래의 묵은 촉은 사라지고 새로 자라난 새 촉이 자라났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진 아래에 직접 수기로 적은 글이 있었다.



밑동에서부터 시작하여 장엄한 기개로 퍼져 나간 중투호(中透縞), 가장자리 끝으로 갈수록 절제와 인내를 더해 가는 중압호(中押縞), 중투호에 새겨진 칼날 같은 절개의 죽반(竹斑), 깊은 산속 세속을 초탈한 고귀한 품격(蘭)이 대쪽 같은 절개와 지조(竹)까지 품고 있으니, 이것은 가히 하늘과 땅과 시간이 빚어낸 최고의 명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잃어버린 인간의 본성에 불같이 내리치는 하늘의 죽비소리라 할 것이다. 내가 이 난을 <천죽음(天竹音)>이라고 명명한 이유이다.


아아! 오늘 아침, 드디어 천죽음(天竹音)의 신아(新芽)가 솟아 나왔다. 새 생명을 알리는 가슴 벅찬 탄생의 울림이 새벽을 열고 있다. 이 난은 이 토끼섬에서의 내 꿈과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늘이 특별히 나에게 보내준 값비싼 선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그날 TV에 출연했던 난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늘어놓았던 예술적 찬사와 최소한 억대가 넘는다는 금전적 가치를 그대로 글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이 글은 소년의 아버지, 후크 선장이 한국 춘란에 대하여 그들 전문가에 못지않은 높은 식견과 예술적 안목까지 갖춘 사람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런 내 생각이 환자에 대한 막연한 외경심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이러할진대 등단시인으로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김 과장은 어련했을까. 김 과장의 환자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태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환자는 물질만능주의의 이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 사람을 잃음으로써 우리가 바라는 유토피아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김 과장의 말이 새삼 귓속에서 쟁쟁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그런 한편으로 나는 갑자기 굵은 쇠못 하나가 가슴에 박혀 버린 것처럼 아픔을 느꼈다. 그 난은 비록 난실 모서리에 버려져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 소년의 아버지, 후크 선장이 채집하여 키우던 그의 소유물이었다. 그리고 후크 선장은 그 난이 아주 고가의 명품이라는 것도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런데 경위야 어떻든 간에 나는 그런 엄청난 고가의 난을 절취한 절도 공범이 되어 버렸다는 때늦은 자각이 들었다.


나는 절도 주범인 원장에 대한 반감과 소년과 후크 선장에 대한 죄책감으로 뒤척이며 그날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피곤해서 얼핏 잠이 들라치면 어느새 후크 선장이 나타나 손에 든 하늘의 죽비로 내 어깨를 호되게 내려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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