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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제 Mar 23. 2023

5. 비 온 날, 식물 산책

반려식물 보약 챙겨주기

어제는 한낮부터 날씨가 꾸물꾸물 구름이 가득하더니, 저녁나절쯤 기어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별생각 없이 가볍게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생각보다 실하게 떨어지는 빗방울에 깜짝 놀라 급히 30구 달걀판용 페트뚜껑으로 임시 우산을 썼다. 평소 같으면 그냥 비가 내리는구나~ 눅눅하네~ 하고 말았을 텐데, 나름 식집사라고 빗물을 좀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 친구들도, 가드닝 지침서가 되어버린 크레이지 가드너에도, 인터넷에도 빗물이 식물에게 더 좋다는 말은 공통적으로 나오는데- 과연 진짜 그럴까? 반박하는 의견도 가끔 보이기도 하고. 블로그 등의 간증(?) 글에서는 빗물만 컨트롤한 게 아니라 햇빛, 바람 등의 조건까지 달라진 경우가 있어 백 프로 믿기 어려웠다.

근데 참, 화분 들인 지 채 한 달도 채 안 됐는데 나는 이미 극성맘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어쨌든 좋다니 우리 애들도 꼭 해줘야지, 그냥 지나갈 수는 없다. 게다가 이 동네는 비도 잘 오지 않는다고.

이게 과연 채워지기는 할까?

얼른 다시 올라가서 물뿌리개와 대야를 들고 내려왔다. 부디 밤새 물이 가득 차기를 바라며.




아침 알람은 언제나 끔찍하다. 아침잠이 많은 내게 상쾌한 아침 같은 건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척비척 일어나 아들 등교 준비시키고 언뜻 시계를 보니 시간이 좀 남았다. 그 새를 못 참고 급하게 현관으로 내려갔다. 찰랑찰랑한 대야를 기대하며 우산도 없이 빗속으로 달려 나갔지만 그러면 그렇지, 제대로 채워진 게 하나도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주변을 둘러보다 어제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현관 지붕 우수관에 눈길이 미쳤다. 이물질이 많을 것 같아 어제는 쿨하게 지나갔었는데, 이쯤 되면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와우!

바닥까지 공간이 얼마 없어 대야를 적당히 욱여넣고 오전시간을 조금 보내다 다시 돌아와 보니, 물이 아주 찰랑찰랑하다. 아주 만족스럽다. 낄낄 웃으며 아직도 바닥에 물이 고일락 말락 한 물뿌리개들에 물을 가득 채워주고 집으로 귀환했다. 아침내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나를 보던 남편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며 한마디 하신다. 평소에는 비가 와도 관심도 없더니 무슨 보약 마냥 그렇게 빗물을 받으러 다니냐고. 그러게, 나도 좀 헛웃음이 나네.

좋은 수확이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친구들한테 가득 찬 물뿌리개를 자랑했더니, 아직도 비가 오냐며 화분을 내놨어도 좋았겠다는 답변이 돌아온 것이다. 아 그래? 팔랑귀는 또 솔깃했다. 물을 그렇게 주는데 과습은 안 와? 신기하게도 장마 때 내놔도 과습 없이 쌩쌩했단다. 도대체 무슨 원리야.. 심지어 다육이도 비를 맞힌다고 한다. 제일 무서운 건 과습과 벌레. 과습은 좀 걱정되지만 괜찮다 하고, 벌레도 비 올 땐 활동하기 힘들 테니 일단 비를 맞혀보기로 했다.

식물 산책중입니다. 약 6시간 비를 맞혔다.

식물을 키우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식멍을 하게 되었다. 친정에 흐드러지게 핀 수국도 그저 한 번 눈길을 주고 아, 예쁘다 하고 감탄만 했지 오래 바라볼 생각은 없었는데.

실내에서도 가끔 화분을 쳐다보며 멍 때리곤 했는데, 애들을 빗속에 내놓으니 또 새로운 모습인 게 짜릿해 늘 새로워 예쁜 게 최고야! 쭈그리고 앉아 쳐다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삭제된다. 심지어 원피스자락이 바닥에 쓸려 물에 축축하게 젖었는데 눈치도 못 챘다.


촉촉이 내리던 봄비도 저녁나절이 되어 기어이 그쳤다. 데리고 나갔던 화분들을 소중히 모시고 들어왔다. 현관 앞쪽이라 화분에서 흘러내린 흙 때문에 많이 지저분할까 봐 빗자루도 하나 챙겨갔는데, 물 줄 땐 그렇게 흘러내리던 흙탕물도 하나 없이 깔끔했다. 떨어진 이파리, 꽃송이를 몇 개 주웠을 뿐이다. 화분 궁둥이를 깨끗이 닦아서 자리에 돌려놓고, 대야에 남은 물은 물뿌리개에 채웠다. 선풍기도 틀어주고 나니 오늘 하루 알차게 잘 보냈다 싶어 괜히 뿌듯하다. 부디 식물들에게 빗물이 진짜 보약이 되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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