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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시작하는 영화 2

<피부를 판 남자>의 자유

by 물가

굉장히 늦었지만 새해 나를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게 도와준 또 다른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하려 한다.

카우테르 벤 하니야 감독의 , 프랑스 튀니지 공동 제작 영화인 [피부를 판 남자]



(주의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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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영화는 흥미롭고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전반적인 이야기의 구조는 복잡하지는 않다.

신분차이가 있는 연인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남자의 이야기는 개츠비의 그것이 떠오르기도 한다.


영화의 배경지인 시리아는 내전과 독재정권 아래 경직된 사회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그 안에서 주인공 샘은 자유롭지 못하고 원하는 사랑을 쟁취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이다.

그런 샘은 예술가 제프리의 제안으로 살아있는 예술 작품이 되고자 한다.


작품이 된 사람은 인간인가 사물인가.


그는 경제적인 자유와 독재주의 정권으로부터 벗어나지만, 그가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작품'은 이제 그를 구속하는 굴레로서 작용한다.


비단 작품이 아니더라도, 독재정권으로부터 도망쳤다고 하지 않더라도,

우린 사회 속에서 다양한 굴레를 가지고 살아간다.

스스로 쓸모를 다 해내야 하고 증명해야 하는 것, 한 인간으로서 사회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

영화 속에서 샘을 소유하는 부유계층조차도 그들이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을 떠올린다면

아니오 라는 답이 나온다.


다만 우리가 살아 가는 이 땅에는 너무나 다양한 환경과 이에 따른 격차가 존재하고, 그렇기에 비극과 처절함의 잣대는 무척이나 불공평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끝끝내 자유로울 수 없을까?


영화의 마지막 모두를 속이고 벗어난 샘은 난 항상 자유로웠다는 이야기를 한다.


나는 영화를 보고 니체의 위버멘쉬가 떠올랐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긍정하며 자신의 삶에 집중해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해 내는 자.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과 위버멘쉬 사이에 걸쳐져 있는 밧줄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존재다. 우리는 위버멘쉬로 나아가다가도 어느새 겁을 집어먹고 동물 쪽으로 발을 돌리게 되는 나약한 존재다. 위버멘쉬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떨쳐버려야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인간적인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위버멘쉬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벌거벗은 두 사람, 가장 큰 사람과 가장 작은 사람 모두를 보았다 ㅡ 그들은 아직도 서로 너무나도 비슷하다. 참으로 가장 큰 사람조차도 너무나 인간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상황은 언제나 긍정적일 수 없다. 인간을 절로 자유롭게 만드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자유는 스스로를 자유를 가진 존재로 인식하는 지점에 존재한다

예컨대 말하자면 고통을 마주할 때 그것을 무엇으로 받아들일지 선택하는 자유,

그리하여 난관에 고개를 조아릴지 혹은 악에 받쳐서라도 고개를 들어 올릴지를 결정할 의지


그것이 존재를 극복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피.판.남 그리고 베.천.시

이 두 영화로 인해 새 해를 사랑과 자유로 시작할 수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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