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_설(雪)

#11. 연인이 된 지 세 번째 날

by 묘해

평소에 불면증이라고는 없이 잘 자는 설이지만 어젯밤에는 더더욱 깊은 잠을 잔 덕에 설은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을 여니 어제와 같이 날씨는 맑았으며 창문을 여니 시원한 겨울바람이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왔다.

설은 맑은 공기를 양껏 들이마시고는 주위를 둘러보다 방 문틈 사이로 종이 한 장이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종이에는 ‘좋은 아침... 우리 스키 타러 가자... 준비되면 나와.. 당신의 연인이...’라고 적혀있었고 단 두 줄의 글이지만 정성 들여 쓴 탓에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쓰여있었다.

‘큭... 귀엽단 말이지... 하긴 작가에게 주는 쪽지인데.. 좀 긴장했을 거야. 그럼 오늘은 스키 타러 슬슬 나갈 준비를 해볼까?’


그때 ‘똑똑’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아직 준비도 안 했는데... 지민인가?’

“네. 들어오세요.”라는 말과 함께 펜션 주인이 따뜻한 차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펜션 주인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였다.

“여행이 마음에 드시나 봐요. 처음에 히로사키에 오셨을 때 보다 얼굴이 많이 밝아지셨네요.”

“아... 그런가요? 아무래도 쉬니까... 하하...”

“오늘도 아침은 필요 없으시죠?”

“네? 네...”

“그럼 오늘도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라는 짧은 인사를 뒤로 하고 펜션 주인은 방 문을 열고 나갔다.

“뭐지? 뭐 아나? 행복한 시간?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든가 좋은 시간 되세요.. 가 아니라 행복한 시간? 행복한 시간은 둘이 보내는 거 아냐? 아닌가? 다 둘인가? 하나 보단 둘인가? 모르겠다...”

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눈만큼이나 하얀 패딩과 하얀 목폴라 티셔츠 그리고 하얀색 스키바지를 입고 설은 하늘만큼 파란 비니를 썼다.

부츠를 신고 밖으로 나가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큭큭’ 거리며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설이 고개를 돌리자 올블랙에 검은색 비니를 쓴 지민이 설을 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보호색이냐?”

“뭐가... ”

“스키 타러 간다니까 눈이랑 깔맞춤 했냐고.. 아주 눈밭에서 보이지도 않겠다.

눈사람이 스키 타는 줄 알겠어.”

“그러는 너는 올블랙으로 무슨 바둑돌이냐... 이건 뭐 손발이 맞아야 도둑질이라도 하지... 드레스 코드를 알아서 좀 맞춰야 되지 않겠냐.”

“기왕이면 피아노 건반이 어때?”

“왜? 굳이?”

“한 세트잖아. 검은건반, 흰건반. 오늘은 그 콘셉트로 가자고.”

“가자고~”

둘이 발까지 맞춰가며 걸어가는 모습을 정원에서 지켜보던 펜션 주인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펜션 밖에는 펜션 주인이 내어준 박스카가 서 있었고 둘은 차를 타고 핫코다산으로 출발했다.

“설아.”

“응?”

“핫코다산에 가봤어?”

“아니. 너는?”

“나도 안 가봤어. 이번이 처음이야.”

“그런데 왜 거길 가자는 거야?”

“어제 잠이 좀 안 와서... 오늘 너랑 뭘 할까 생각을 하다가... 그래도 눈으로 유명한 아오모리에 왔는데 겨울 스포츠 하나는 즐겨줘야 하지 않나 싶더라고.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여기 핫코다산이 유명하더라고.”

“어제 왜 잠이 안 왔어? 그러고 보니 너 얼굴도 조금 까칠하다? 나랑 맥주 마시고 바로 잠든 거 아녔어?”

“아... 뭐... 그냥 조금 설레서 잠을 못 이뤘달까... 그러는 너는 아주 푹 잔 모양이다... 오늘따라 피부가 더 좋아 보이는데?”

“응. 완전 푹 잤어. 평소에도 잘 자는데 어제는 피곤했는지 완전 기절 모드였어.”

“뭐... 설레거나 마음이 꼼지락거리거나 이런 거는 없었어?”

“응? 뭐가?”

“아니다...”

“뭐가 또 아냐.”

“그보다 스키 탈 줄은 알아?”

“나 움직이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 할 줄 아는 스포츠가 없는데. 그나마 스키는 조금 타.

내가 너무 안 움직이는 데다가 추운 걸 너무 싫어해서 겨울에는 진짜 꼼짝을 안 하거든.”

“이름이 설인데? 추위에 약해? 겨울에 태어나지 않았어?”

“맞아.. 그런데 추운 거 딱 질색이야... 그런데 눈은 또 아주 좋아해... 그런데 눈은 추운 곳에만 있잖아...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지... 슬프다.”


조수석에 앉아 쫑알거리며 말을 하는 설이 오늘따라 더더욱 귀여워 보였다.

설은 말을 하다 말고 호주머니에서 귤 두 알을 꺼내어 까기 시작했고 반은 자신의 입에 집어넣고 나머지 반은 운전 중인 지민의 입속에 넣어주며 하던 말을 이어갔다.


“꼼짝을 안 했는데... 내 건강이 걱정이 됐는지... 참... 내가 작품에 들어가면 그 자리에 앉아서 꼼짝도 안 하거든...

그래서 도겸이가 겨울이 되면 스키장에 나를 끌고 갔어... 좀 움직여야 된다고... 그나마 눈 보러 가자... 차 안에 있고 호텔 안에 있으면 하나도 안 추우니까 눈 보러 가자... 그러면서 나를 꼬셨어... 그렇게 스키장에 몇 번 가다 보니까 스키 타는 사람들이 재밌어 보이더라고... 그렇게 조금 배우게 됐어.”

설의 얘기를 듣던 지민의 얼굴빛이 조금씩 어두워졌고 남은 한 알의 귤을 까서 반은 자신의 입으로 그리고 나머지 반은 지민의 입속으로 넣어주다가 어두워진 지민의 얼굴을 발견하며 물었다.


“왜 그래. 갑자기? 피곤해? 내가 운전할까?”

귤을 맛있게 먹으며 설이 물었다.

“너의 시작과 끝은 항상 김도겸 대표구나 싶어서...”

“응? 아... 스키 탈 줄 아냐고 물어보니까... 그보다 너 지금 그거 질투라는 것이여? 지금? 그 낯간지러운 걸 서지민 대배우님께서 하고 있는 거야?”

설이 까르르 웃기 시작했고 그 바람에 들고 있던 귤껍질이 차 시트 밑으로 또르르 떨어졌다.

“설아...”

한참 웃던 설은 지민이 부르는 목소리에 지민을 쳐다보았다.

사뭇 진지한 지민의 표정에 설의 웃음은 뚝 그쳤다.

“왜 그래... 갑자기...”

“설아... 나를 만난 이후로 너의 모든 시작과 끝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서지민이었으면 해. 너의 모든 시간과 순간순간들이 나로 채워졌으면 좋겠고 나와 함께였음 좋겠어.”

지민의 진지한 말에 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할 수 있지. 설아?”

“그렇지만 도겸이는 출판사 대푠데...”

“그러니까 김도겸 대표와는 비즈니스만 하고. 그 외의 모든 시간은 나로 채우는 거야.. 앞으로...”

“앞으로?”

“응. 앞으로.”

“언제까지?”

“언제까지나. 그렇게 할 수 있지? 약속해.”

“응. 약속할게.”

설의 대답을 기어이 듣고 나서야 지민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어렵게 그녀의 마음을 얻은 만큼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그녀의 티끌만큼이라도 지민은 내어줄 마음이 없었다. 설사 그 상대가 김도겸 대표라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 차는 뭐야? 렌트했어? 이 아침에 렌트까지 알아본 거야?”

“펜션 주인 차야.”

“에? 어쩌다?”

“렌트 좀 알아봐 달라고 아침에 부탁드렸는데. 한동안 차 쓸 일이 없다며 키를 주시더라고... 감사히 받았지.”

“흠... 그분은 대체 뭘까?”

“뭐가?”

“꼭 우리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사람 같아서 말이야.”

“우리가? 이렇게? 이렇게가 어떻게인데?”

“그야 우리가 연인 사이가.... 야! 서지민!”

운전을 하며 지민은 큭큭 웃었다.

“너 일부러 내 입으로 그 말이 듣고 싶어 그런 거지.”

“오~ 작가답게 눈치도 빠른데~”

“하여간 신기한 분이란 말이야.”

둘이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덧 목적지인 핫코다산에 도착했다.




“도착했다. 설아 내리자... 추울 테니까 패딩 지퍼 잘 잠그고.”

설의 옷매무새를 만져주려 설을 쳐다보던 지민은 설의 넋이 나간 표정을 보았다.

설은 핫코다산의 설경에 이미 정신이 아득해져 있었다.

그런 설을 보며 지민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지민아... 여기 너무 아름다워. 상상만 하던 그런 곳이야... 여기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

“응. 아름답지? 이러지 말고 어서 내리자... 아름다운 눈 같이 밟아보자.”


둘은 차에서 내려 뽀드득 소리가 나는 눈을 밟았다.

뽀드득뽀드득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들려오는 청량한 눈 밟는 소리에 설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유독이나 눈 밟는 소리를 좋아하는 설인 데다 사람이 밟지 않은 눈을 밟는 기쁨까지 더해져 설의 마음은 한없는 기쁨으로 차올랐다.

그렇게 설은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한참을 눈 밟기를 했고, 그런 설을 재촉하지 않고 설이 마음껏 눈을 밟는 동안 지민은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설의 눈 밟기가 끝이 나고, 설은 지민을 쳐다보며 말했다.

“됐어. 이제 가자.”

“가자.”

지민은 차 뒷좌석에 놓아둔 스키 장비를 메고 설과 손을 잡으며 눈밭 위를 걸어갔다.

“스키는 언제 준비한 거야?”

“하나는 내 꺼고, 하나는 펜션 주인한테 빌린 거.”

“또?”

“응. 또... 큭큭 핫코다산 간다니까 빌려주시더라고.”

“그분은 정말 미스터리야. 나중에 작품에 캐릭터로 녹여놔야겠어.”


눈밭 위를 걷다 보니 로프웨이 산장이 나왔다.

“배 안 고파?”

“조금 고프긴 한데. 아직은 괜찮아.”

“그럼 일단 산장에 들어가서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스키 타고나서 우동 먹으러 갈까?”

“응. 그러자.”


산장 안에는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손님이 많지 않았다.

사람들이 북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적한 산장 안을 보고 둘은 안심했다.

커피 두 잔을 받아 들고 설과 지민은 잠시 자리에 앉았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설은 지민에게 말했다.

“펜션에서 보던 눈과는 느낌이 또 다르네. 이렇게 원 없이 눈을 볼 수 있다니 정말 좋아.”

“나중에 한국 가면 강원도로 놀러 가자. 거기도 눈 많아.”

지민의 말에 설은 조금 슬퍼졌다.

“한국 가면 우리가 지금처럼 자유로울 수 있을까?”

“왜 그런 생각을 해. 나는 어떡해서든 설이 너를 만날 거야.

너를 만나지 못한다면 배우도 그만둘 거야.

나한테 너는 이미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지민의 말에 설은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스키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고, 하나둘 로프웨이를 타고 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저 사람들 중에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겠지?

나야 뭐... 일본에서는 유명인도 아니고... 지민을 알아보는 사람은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에 잠기던 설은 이내 불안한 생각을 떨쳐내고 자신의 앞에 앉아 창 밖의 눈을 바라보는 지민을 쳐다보았다.

지민의 속눈썹이 유독 길었다.

지민 특유의 고혹한 눈빛은 저 긴 속눈썹이 한몫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잠시 몸을 녹인 후 설과 지민은 로프웨이를 타고 산 위를 올라갔다.

눈앞에 펼쳐진 설경에 정신을 잃은 것도 잠시 이상하고 신비한 모양의 눈 탑들이 나타났다.

“저게 뭐야?”

설이 지민에게 물었다.

“아. 저거? 아이스 몬스터 또는 설빙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자연현상인데 나무 위에 눈이 내려앉아서 생긴 거야.”

“저게 나무라고?”

“응. 나무야. 분비나무에 얼음과 눈이 합쳐져 만들어진 예술품이지.”

“엘사가 나올 것 같아! 진짜 멋진데!”

설은 로프웨이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아이스 몬스터를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너는 모르는 게 없네?”

“오기 전에 공부했어. 사진으로 봤는데 사진만으로도 굉장히 특이해 보였거든.

그래서 좀 찾아봤지. 너한테 알려주고 싶기도 했고.”

“굉장하다!”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하는 설이 너무나 이뻤다.

좋아하는 눈을 보며 그리고 신기한 눈의 형태를 보며 예상했던 대로 설은 신이 났고 그 모습이 너무나도 예뻤다.


로프웨이는 어느덧 정상에 도착했고 설과 지민은 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높은데? 설아, 괜찮겠어?”

“로프웨이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게 진짜 높네. 좀 겁나는데?”

“그럼 일단 스키 조금만 타고 내려가서 걷자. 눈밭에서 걷자.”

“그래. 그러자.”

지민이 앞장서서 스키를 타고 산을 내려갔고 지민이 내려가는 길을 따라 설도 천천히 조심스럽게 스키를 타고 내려갔다.

스피드를 느끼며 눈의 사각거림을 온몸으로 받으며 산 중턱에 내려왔을 때 앞에 가던 지민이 멈춰 섰고, 설도 곧 지민의 옆에 나란히 섰다.

“설아. 어때? 괜찮아?”

“정말 좋아! 대박이야!”

“그래? 다행이다. 여기서 조금 쉴까?”

“그러자.”


둘이 스키를 벗고 잠시 자리에 앉자 다른 스키어들이 그들 옆을 지나갔다.

몇몇은 설과 지민처럼 스키를 잠시 멈추고 눈을 만끽하며 사진도 찍고 눈밭에 구르기도 하였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지민이 설에게 말했다.

“설아. 우리도 저거 해보자.”

“뭐? 눈밭 구르기?”

“응.”

“당연히 해야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설은 몸을 동그랗게 말아 구르기 시작했다.

“같이 구르자고!”

설의 뒤를 따라 지민도 눈밭에 굴렀다.

머리카락이며 비니며 심지어 얼굴까지 온통 눈이었다.

얼굴이 차갑다 못해 따끔거렸지만 설은 연신 웃으며 눈 위에 큰 대자로 누워 양팔과 다리를 휘저었다.

그런 설의 몸 위에 지민은 자신의 몸을 포개어 다시 구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구르던 둘은 서로의 모습에 웃기 시작했다.


“아이스 몬스터. 큭큭”

“내가? 나 배운데?”

“배우는 무슨... 얼굴이 안보이잖아, 지금... 그냥 아이스 몬스터야... 하하하,”

“설아, 그대로 누워 있어 봐. 내가 사진 찍어줄게,”

지민은 핸드폰을 꺼내어 설의 사진을 찍었다.

눈밭 위에서 함박웃음을 띤 채 누워있는 설은... 아름다웠다.

설의 아름다운 모습에 연신 사진을 찍어댔고, 설은 자리에 앉아 눈을 양손에 가득 담아 '후~'하고 불었다.

순간 작은 눈보라가 일어났고 그 찰나를 지민은 사진에 담았다.

“이제 같이 찍자,”

설이 지민에게 말했고, 둘은 세상 다정한 모습으로 그리고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러브스토리의 한 장면 같다.”

찍은 사진을 보며 지민이 말했다.

“러브 팩트지. 아님 러브 논픽션? 스토리는 이야기니까 우리는 이야기 아니잖아. 팩트지.”

“오! 한 설! 최근 본모습 중에 가장 솔직한데? 맘에 들었어.”

“맘에 든 거는 고마운데...”

“고마운데?”

“이제 배고픈데?”

“그럼 슬슬 내려가자.”

둘은 다시 스키를 타고 산장으로 내려왔다.


산장 2층에는 간단한 먹을거리를 팔고 있었다.

지민이 우동 2개와 카레 하나를 주문했다.

“왜 세 개야?”

“네가 두 개 먹을 거 같아서.”

“내가 돼지냐?”

“아니, 우동은 뜨끈한 국물 먹이고 싶어 주문한 거고, 카레는 네가 좋아하는 거니까 주문한 거야.”

“그것도 알아?”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있을 것 같아?”

“혹시... 스토커?”

“잘생긴 스토커지.”

“아... 부인할 수가 없네.”

둘이 웃으며 얘기하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설은 지민의 말대로 우동 하나와 카레 하나를 순식간에 먹어 없앴다.


펜션으로 돌아오는 길에 설은 피곤했는지 그대로 곯아떨어졌고, 그런 설이 행여나 깰까 봐 지민은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였다.

차는 어느덧 펜션 앞에 도착했고, 지민은 설이 깰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벌써 다 온 거야?”

설이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응. 다 왔어.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서 씻고 자. 내일 또 보자.”

“응.”

설은 방으로 들어와 눈밭에서 구르던 옷만 간신히 벗고 그 자리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깊은 잠에 빠져있던 설은 눈을 떴다.

밖은 아직도 한밤중이었다.

핸드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네 시 반이었다.

펜션 뒤편 작은 뜰에 조그마한 야외 온천이 있다던 펜션 주인의 말이 생각났다.

‘이 시간에 온천 하려나? 나가볼까?’

설은 옷장 안에 걸려있는 유카타를 입고 밖을 나섰다.

펜션은 한밤중인 만큼 고요했고, 저번처럼 지민이 나올까 더더욱 조심히 걸으며 펜션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밖이라고 해봐야 야외 온천과 이어진 긴 복도일 뿐이라 생각보다 무섭지는 않았다.

온천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고 고요했다.

설이 입고 있던 유카타를 벗자 유카타 안에 속옷조차 입지 않은 탓에 설의 맨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설은 아무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누가 볼세라 얼른 온천 안으로 들어갔다.

온천물은 생각보다 뜨거워서 그 물에 발끝이 닿았을 때 온몸에 짜릿한 전기가 퍼져나갔다.

몸을 온천물에 담그자 그 전기는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졌고, 설은 또 나지막하게 ‘으... 시원하다.’라는 아저씨 멘트를 하였다.

온천 안에서 바라본 세상은 고요하고 묵직했으며 고즈넉했다.

온 세상에 설만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몸을 뜨겁게 달구며 설은 잠시 작품 구상을 했다.

다음 작품의 배경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아오모리였으며 며칠간 돌아다닌 아오모리 곳곳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작품에 담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느끼는 고요함을 작품 속에 녹여내겠다 생각했다.

이 작은 펜션에 사람이라고는 지민과 설 그리고 펜션 주인 뿐이라는 사실도 새삼 묘하게 느껴졌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지민은 오늘은 설과 어떤 데이트를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핸드폰을 꺼내 ‘아오모리 여행’이라고 검색을 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걸어가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가 들어도 무척이나 조심하는 발걸음이었다.

‘한 설... 또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이 새벽에 어딜 가시나... 옥상 올라가나? 피곤할 텐데 왜 벌써 일어났지?’

밖에서 아주 작게 들리는 소리가 설임을 확신한 지민은 야밤에 혼자 어딘가를 가는 설이 걱정되어 옷장에서 유카타를 꺼내 입고 방문을 나섰다.

살금살금 뒷문을 향해 걸어가는 설이 보였다.

지민이 예상한 대로 설이었다.

어젯밤과는 다르게 옥상이 아닌 뒷문으로 설은 걸어가고 있었다.

‘아... 뒤뜰에 작은 온천이 있다고 했지? 온천에 가나?

이 시간에 온천에 가도 되나? 누가 있으면 어쩌려고. 혼자서... 하여간 겁이 없어요.’

지민의 예상대로 설은 뒷문과 이어진 긴 복도를 지나 야외 온천으로 향했다.

‘설이를 불러서 같이 온천하자고 할까? 그럼 바로 변태 취급하겠지? 어쩌면 맞을지도 몰라...

이 새벽에 맞는 건 좀 싫은데. 어쩌지?’

지민이 망설이는 사이 설은 온천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듯 그녀가 입고 있던 유카타를 순식간에 벗어 내렸다.

유카타 안에는 속옷조차 입지 않은 설의 알몸이 그대로 드러났고, 그런 설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설의 몸 위로 포근한 달빛이 쏟아져 내렸고 설의 발 밑으로는 온천의 따뜻한 연기가 올라와 그 사이에 서 있는 설은 여신 그 자체였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가느다란 허리는 보호 본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가느다란 허리 아래로 이어지는 그녀의 엉덩이는 손으로 꽉 쥐어보고 싶을 만큼 탐스러웠으며 그 밑으로는 운동으로 다져졌을 것만 같은 탄력적인 허벅다리가 드러났다.

그녀의 뒷모습에 넋을 잃는 것도 잠시 설이 온천에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몰래 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죄스러움이 느껴졌다.

잠시 후 고개를 돌려 다시 쳐다본 설은 이미 온천 안에 몸을 담근 후였다.

깊은 숨을 여러 번 몰아쉬고 난 후 지민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나지막하게 말을 했다.

‘더는 못 참겠어... 한계야...’

한참을 온천 안에서 몸을 녹이던 설은 순간 잠이 들뻔하자 깜짝 놀라며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수건도 없이 유카타만 입고 나온 터라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모아 한쪽 어깨로 넘겨 조심스레 물기를 짜내고 온천 밖으로 나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 그대로 유카타를 입었다.

조금 전 걸어온 복도 쪽으로 걸었고 설의 방 쪽으로 향하던 때였다.

맞은편 복도 끝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 시간에 누구지? 여기는 나랑 지민이랑 펜션 주인뿐인데?

지민은 지금쯤 기절했을 거고, 펜션 주인은 저렇게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걷지 않는데, 누구지? 도둑인가? 엄마야.’

몸의 털이 바짝 서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지금 설의 옷차림은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될 만큼 실오라기 하나밖에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완전 무방비 상태에 놓인 설은 걸음을 멈추고 반대쪽 복도 끝을 응시했다.

곧바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고 모습을 드러냈다.

숨을 곳조차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버린 채 서 있던 설은 그 모습이 지민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쉬는 동시에 지금 자신의 차림새를 깨닫자마자 조금 전보다 더 긴장을 했다.

맞은편에서 자신과 똑같은 유카타를 입은 지민이 성큼성큼 걸어와 설 앞에서 멈추었다.

설의 위아래를 훑고 난 후 진지하다 못해 정색한 표정으로 지민은 설에게 말했다.


“내가 도둑고양이처럼 다니지 말랬지.”

“아니... 그게 아니고...”

“이런 차림새로... 하... 더는 안 되겠어...”


지민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설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키스를 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지민의 도톰하고 따뜻한 입술의 온기가 그대로 설에게 전해졌다.

지민을 밀쳐 내야 한다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런 설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민은 설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고 그 틈에 벌어진 설의 입속으로 혀를 집어넣어 그녀의 혀를 탐하기 시작했다.

설은 지민의 저돌적인 행동에 순간 ‘아’하는 탄성이 나지막하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설의 얼굴을 감싸던 두 손은 얼굴에서 내려와 한 쪽 팔로 설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았고 다른 한 손으로 설이 입고 있던 유카타의 끈을 자연스럽게 풀었다.

끈이 풀리자 유카타는 힘없이 내려갔고 그 바람에 설의 한쪽 어깨와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달빛 아래 선홍색의 탐스럽고 봉긋한 가슴이 드러나자 지민은 이성을 잃고 설을 번쩍 들어 안아 성큼성큼 걸어가 설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진출처 : www.pixab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