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_설(雪)

#12. 연인이 된 지 네 번째 날

by 묘해

아오모리에는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펜션 주인은 펜션 입구의 눈을 살짝 빗질한 후 설의 방 쪽으로 조심히 걸어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어제 스키를 타고 돌아온 설이 혹시나 감기에 걸린 건 아닐까 걱정이 된 펜션 주인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설과 지민이 한 이불속에 누워 서로를 꼭 껴안은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펜션 주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인기척에 지민은 잠에서 깼다.

눈을 뜨니 품 안에서 곤히 자고 있는 설이 보였다.

지민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설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먼저 그녀의 반듯한 이마가 눈에 들어왔고 이마에서 이어진 날렵하지만 부드러운 곡선의 코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 어제 처음으로 느껴본 그녀의 핑크빛 입술을 보았다.

뺨은 간밤에 온천을 한 덕에 살구빛을 띠고 있었다.

설의 모든 생김생김이 다 마음에 들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눈은 그녀가 감고 있어서 아직 보이지 않았다.

빨리 설과 눈을 마주 보며 어제와는 달라진 자신과 그녀를 느끼고 싶은 마음에 지민은 설의 코 선을 손가락으로 조심히 쓸어내렸다.

그 탓에 설은 간지러운 듯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드디어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지민을 발견한 설은 간밤의 일이 생각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그런 그녀를 살포시 안으며 지민이 말했다.


“잘 잤어? 나의 여신님.”


지민의 달콤한 아침 인사에 설은 행복함을 느끼며 더 깊이 지민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설을 지민은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안아주었다.


“배고프지 않아?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배 안 고파.”

“왜?”

“부끄러워 못 일어나겠어.”

“뭐가 부끄러워?”

“그냥... 다...”

“설아.”

“응?”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할 건데. 내 말을 들으면 너는 더 부끄러워질 거야.”

“하지 마... 아니다.. 뭔데? 무슨 말인데?”

“이불 안을 한 번 볼래?”

지민의 말에 설은 눈을 뜨고 이불 안을 보았다.


“엄마야!!!”

깜짝 놀라는 설을 지민은 꼭 껴안았다.

“괜찮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래도 되는 거야.”

지민의 말에 설은 더더욱 부끄러워져 덮고 있던 이불을 바짝 당겼다.

“우리 이제 옷이든 뭐든 좀 입을까?”

“왜... 살 맞대고 있으니 좋기만 하고만.”

“좋기는... 한데...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고.”

“알았어... 그럼 딱 십 분만 더 이러고 있자.”

“응.”

이불 안에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설과 지민은 조금 더 누워있었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난 후 설과 지민은 펜션 앞 복도에 나란히 앉아 내리는 눈을 구경했다.

“우리 오늘은 뭐할까?”

지민이 설에게 말했다.

“오늘은 계획 안 세웠어?”

“계획 세우려다가 어제 너 따라가느라 못 했어.”

지민의 말에 또 얼굴이 붉어진 설은 애써 침착해하며 말했다.

“흠흠... 그 얘기는 됐고, 오늘은 눈 구경하면서 펜션 안에 있을까?”

“그럴까? 나는 어디라도 상관없어. 너와 같이 있으면 어디라도...”

“나도 그래.”


둘은 내리는 눈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다 펜션 주인과 마주쳤다.

“오늘은 밖에 나갈 계획이 없으신가 봐요?”

펜션 주인의 물음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둘에게 살짝 웃음을 지은 후 펜션 주인은 부엌으로 향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지민은 문을 열어 주었다.

펜션 주인이 작은 화로를 들고 있었고 화로 안에는 잘 익은 밤들이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눈도 오니 군밤이라도 드시라고요.”

펜션 주인이 준비해준 화로를 건네받은 지민은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화로를 들고 설에게 다가갔다.

“뭐야?”

“군밤이야.”

“우와! 맛나 보인다.”

둘은 화로 가까이에 앉아 익어가고 있는 군밤을 바라보았다.

“설아.”

“응? “

“너는 우리가 이렇게 연인이 될지 상상해 본 적이 있어?”

“아니. 너는?”

“나는 상상했어.

그것도 자주... 뭐 매일은 아니고... 자주는 했어.”

“그래?”

“응.”

“그럼 꿈이 이루어진 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너는 어때?”

“나는 누군가를 이렇게 마음에 깊이 담은 건 처음인 거 같아.

이 감정이 좋고 이런 내가 신기해. 그리고 그게 너라서 다행이야.”

“왜 나라서 다행이야?”

“솔직히... 그날... 인터뷰하던 날. 그날 너를 처음 봤는데...”

“봤는데?”

“너무 놀랐어.”

“왜 놀라?”

“마음에 들어서... 잘생긴 데다가...

너 눈... 사람을 관통하는 듯한 너의 눈과 고혹적인 눈빛에 놀라고 순식간에 빠져들었었어.”

“뭐... 만나보고 싶다거나... 그를 가져야겠다... 이런 의지는 안 생겼어?”

"안 생겼어.”

“아니 왜?”

“너 같은 멋진 남자를 내가 어떻게... 그런 건 상상도 못 하지.”

“그럼 지금은 어때? 나를 가졌잖아.”

"세상 다 가진 것 같아... 나 행복해 지민아.”


담담히 고백하는 설의 말에 지민의 마음은 따뜻해졌고, 앞으로 어떠한 순간이 와도 그녀를 지키겠다 다짐했다.

화로 앞에 나란히 앉아 군밤이 익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지민은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대학 시절, 처음 설을 본 날을 지민은 떠올렸다.



“서지민! 이번에도 네가 과 탑이야. 이 괴물 같은 녀석아!”

친구 호영이 지민을 보며 뛰어와서 말을 했다.

대학 캠퍼스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지민은 호영을 쳐다보았다.

“벌써 결과가 나왔어?”

“그래 인마! 과사무실 앞에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더라.

너는 어째 못 하는 게 없냐~”

지민이 호영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뭐라는 거야~”

“뭐긴 인마! 내가 너랑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 아니냐...

너 그때도 공부며 전교회장이며..

거기다가 운동까지 뭐 하나 놓치는 게 없었잖아... 나는 그때 생각했다.”

“뭐를?”

“너랑 꼭 베프 먹어야겠다고.”

“내가 잘하는 거랑 너 베프 먹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친구 호영의 말이 웃기는지 지민은 연신 웃어댔다.

“너는 나중에 뭐라도 될 놈이니까... 친구 잘 둔 덕 좀 보려고 그런다 왜.”

호영의 말에 지민은 크게 웃었다.


지민은 어릴 적부터 공부며 운동이며 뭐든 잘하는 아이였다.

지민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지민에게 검도를 무려 십 년이나 배우도록 하셨다.

사내아이가 계집애같이 생겨 나중에 중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거친 반 친구들에게 놀림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지만, 아버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친구들은 뭐든 잘하고 잘생기기까지 한 지민을 좋아했고 선망의 대상으로도 생각했다.

잘하지만 티 내지 않고 튀지만 뽐내지 않는 지민의 성품 또한 한몫을 하였다.

남학생들은 물론 여학생들에게도 지민은 인기쟁이였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지민은 경영학을 전공하였고, 유학을 다녀오고 나면 가업을 물려받아 아버지 회사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지민 앞에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래서 너 유학은 언제 가냐?”

“이번 학기 끝내면 갈 거 같아.”

“너 갔다 오는 동안 여기는 내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나 잊으면 안 된다.”

“네가 뭘 지키냐... 큭큭... 너는 너나 잘 지켜.. 인마.”


지민은 호영과 한바탕 웃고 난 후 수업을 들으려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때 반대편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봄 햇살에 눈이 따갑지도 않은 지 내리쬐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책을 읽고 있는 여학생은 긴 생머리가 봄바람에 가볍게 날렸고 그녀가 입고 있는 하늘색 셔츠도 머리카락과 함께 자연스레 바람을 맞고 있었다.

지민은 한참을 멍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 뭐 보냐?”

“아... 호영아... 저기 저 여자...”
“응? 누구?”

“저기 벤치 위에 긴 머리...”

“아! 응.”

“혹시 누군지 알아?”

“야... 너는 진짜 여자에 관심이 없구나! 한 설이잖아, 한 설!”

“한 설?”

“그래 인마, 한 설! 한 설 선배.”

“선배야? 어려 보이는데?”

“선배야... 너는 어째 한 설도 모르냐...”

“왜? 알아야 돼?”

“우리 학교에서 한 설 선배 모르는 거는 아마 너뿐일 거다.”

“왜? 이뻐서?”

“이쁘기도 한데... 무엇보다 뇌가 섹시하지... 장난 아냐.”

“무슨 말이야, 그게?”

“아! 맞다... 너도 얼마 전에 신문사에 올라온 글 봤지?”

“특별한 사람?”

“그래! 그거 한 설 선배가 쓴 거잖아.”


지민이 깜짝 놀라 호영을 보며 말했다.

“진짜?”

“그래. 인마~ 너도 그때 그 글 보고 놀랬잖아.

이거 누가 쓴 거냐고 물어서 내가 이름은 말해준 거 같은데...”

“글을 진짜 잘 쓰는구나... 그래서 뇌가 섹시하다는 거야?”

“뇌도 섹시하고 뇌만큼이나 얼굴도 아주 예뻐...

멀리서 봐도 느껴지지? 분위기 장난 아닌 거?”

지민이 멍하게 계속 한 설만 쳐다보고 있자 호영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거기다가 성격도 장난이 아니에요.”

지민이 호영을 보며 말했다.

“성격이 왜? 이상해? 사차원이야? 까칠해?”

“아니, 그보다... 곁을 안 줘.”

“곁을 안 준다고?”

“응. 주위에 친구고 뭐고 아무도 없어.”

“왜?”

“들리는 말로는 낯가림이 엄청 심하대...

너 그 선배 알지... 김 도겸.”

“응. 김 도겸 선배는 이름 몇 번 들었어.”

“그 선배랑 둘이 동기인데, 김 도겸 선배랑만 얘기한대.”

“왜?”

“모르지 뭐... 아마 둘이 사귈 걸?”

“그래?”

“소문이 그래... 아주 선남선녀 둘이 다 해 먹는다고...

한 설 선배는 안 그래도 낯가림이 심한데, 김도겸 선배가 누구도 한 설 선배 옆에 얼씬도 못 하게 한대..

암튼 한 설 선배 유명해... 둘이 유명해, 둘이...

그나저나 네가 웬일이냐... 여자한테 관심을 다 가지고...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지민은 호영의 말이 끝나도록 한 설을 쳐다봤다.

처음 본 그녀의 모습은 뇌리에 강하게 박힐 만큼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특별한 사람’을 쓴 장본인이 그녀라니... 마음속에서 이상한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그날 이후, 지민은 그동안 한 설의 이름으로 신문사에 올라온 글을 다 읽어 보았다.

호영의 말로는 한 설은 작가가 될 게 분명하다고 하였다.


가장 최근에 쓴 그녀의 글은 ‘죽음에 대한 고찰’이었고 그 글을 읽고 난 후 지민은 한동안 잦은 몸살을 앓았다.

그녀의 글대로 얼마나 자신의 삶을 진실되게 하루하루를 살아왔나 그리고 후회하지 않을 만큼 열정적으로 살아왔는가.. 지금 당장 죽음이 내 앞에 다가오더라도 나는 기꺼이 그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미련 없이 진심을 다해 내 삶에 임했는가... 를 스스로 물어보았다.


그녀의 글을 읽을수록 그녀의 문장 하나하나를 되새길수록 지민은 그녀가 더욱더 궁금해졌고, 옆에 있고 싶어 졌고, 결국 어떻게 해서든 그녀 옆에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자신도 한 설만큼이나 멋진 사람이 되어야... 그래서 그녀 옆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민은 그동안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갈 순리대로의 길을 벗어나겠다 결심을 했다.

그녀가 작가라면 작가와 가까워질 수 있는 다른 길을 가겠다 결심했다.

언젠가 그녀를 작가와 배우로 만나겠다 다짐을 했다.


그렇게 지민은 MG소속사에 오디션을 보았고 송 과장의 눈에 띄어 배우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언젠가 설의 소설이 시나리오로 만들어진다면 그 작품은 무조건 본인이 연기하겠다 다짐을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지금 그녀 한 설은 자신의 옆에 앉아 같이 화로를 보며 군밤이 익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꿈에 그리던 그녀가 나의 여신이 되어 지금 옆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지민은 무한한 행복함을 느꼈다.


“다 익었다. 자, 먹어봐.”

지민이 군밤 하나를 건네자 설은 입을 아~ 하고 벌렸고, 새끼 새에게 먹이를 주듯 지민은 설의 입으로 군밤을 넣어 주었다.

“맛있어?”

“응. 맛있어. 너도 먹어봐.”

따뜻한 화로 앞에서 군밤을 나눠 먹으며 설과 지민은 행복해했다.

여전히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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