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짜가 있다. 바로 입대일이다.
2012년 3월 20일 화요일. 세상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울산에서 의정부로 가는 길 내내 하늘은 노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늘이 노랗다'라는 말이 실제로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게 되었다. 점심으로 먹은 부대찌개마저 카레처럼 느껴질 만큼 정신이 흐릿한 하루였다.
"군대 가면 배울 것 없고 시간만 허비하니 안 갈 수 있다면 안 가는 게 최고다."는 선배들의 조언과는 달리 나에게 군생활은 제법 큰 마일스톤이 되었다.
인사과에서 근무한 경험은 지금의 직장과 일을 선택하게 만든 계기 중 하나였다. 또,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대한민국 남성'이라는 기준 아래 무작위 배치되는 군생활은 세상이 얼마나 다양한지 알게 해 주었고, 계급에 기반한 조직생활은 미리 경험하는 작은 사회였다.
나에게 있어 3월 20일은 하나의 이정표이자 변곡점이었다.
그리고 오늘 2026년 3월 20일. 춘분이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 그리고 이 날을 기점으로 하루 중 낮의 길이가 밤의 길이보다 길어지는 날.
과거에는 춘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하면서 마을의 머슴들을 불러 모아 일 년 농사가 잘되길 기원하며 '머슴떡'을 만들어 나눠먹었다고 한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이라 하여 '균형'에 의미가 있는 날이 아닐까 추측했었으나, 낮이 더 길어지니 농사를 '시작'하자는 의미를 가진 절기였던 춘분.
어쩌면 균형이 가지는 의미가 그저 '같음'에 국한되지 않겠다는 사유의 시작이었다.
50:50이라는 동등한 비율, 혹은 어떤 물체의 무게중심을 잡아 모서리를 세우는 것. 이와 같은 균형은 나에게 불안과 초조함으로 느껴진다. 살짝만 기울여도, 조금만 건드려도 어느 한쪽으로 쓰러지기 쉬운 상태 같아서이다.
지난 화요일에는 회사 업무 차 부산 출장을 다녀왔다. 중소기업 재직자를 대상으로 제공하는 AI 교육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참관하고 모니터링하기 위함이었다. 교육장을 둘러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교육생 분들의 연령대가 아주 다양했다. 00년대생부터 60년대생까지. AI 교육이라고 해서 2~30대가 많이 참여할 것이라는 내 작은 편견이 괜히 부끄러웠다.
그 부끄럼 탓인지, 같은 교육내용이지만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그들 각자의 역할에 적용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물씬 새롭게 다가왔다.
마을의 일꾼들을 한데 모아 떡을 만들어먹고 올 한 해 농사 잘해보자 다짐하듯, 다양한 일터의 사람들이 모여 같은 교육을 듣고 다시 각자의 사업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함께 오버래핑되며.
어쩌면 균형이란 같음이 아니라 '공존'이 아닐까,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가 아닐까 생각했다.
춘분은 균형이 완성되는 날이 아니라, 우리가 균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드러내는 날이다.
2012년의 춘분은 나에게 입대일이자, 의지와 무관하게 기울어졌던 날이었고,
2026년의 춘분은 내가 그 기울어짐을 스스로 인식한 날이었다.
춘분은 나에게 기억의 기준이자 방향을 다시 확인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