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두 사람을 살리는 마음의 형태이다
글을 쓸 때 찾는 카페 몇 군데가 있다. 최근에는 카푸치노를 자주 마셨는데, 카페마다, 또 바리스타마다 우유거품을 내는 기술이 꽤 다르다. 어느 날은 촘촘하고 구름 같은 거품이 감탄을 남기고, 또 어느 날은 거품 속 공기가 투박하게 살아 있어 서투른 퀄리티에 괜히 마음이 간질거리기도 했다.
비슷한 비용과 기대를 가지고 같은 음료를 주문했는데도 이렇게 다른 결과를 마주한다. 그 차이를 보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서투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속한 사회는 그 서투름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요즘은 유튜브와 SNS를 통해 관계와 심리에 대한 정보가 빠르게 퍼진다. 도움이 되는 부분도 많지만, 때로는 과정이 생략된 '정답'이 우선시 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타인의 서투름을 향한 시선도 점점 단호해지고, 작은 실수조차 용납되기 어려운 분위기가 만들어지곤 한다.
그런데 사람은 삶을 사는 동안 계속 부딪히고, 고민하고, 흔들리며 성장하는 존재다. 그러니 작은 서투름까지 단정적으로 판단하려는 흐름은 결국 내 삶과도 어딘가에서 직접 충돌하게 된다.
서투름은 단순히 어설퍼서 도와주고 싶은 여린 부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도 잘 몰라 말과 행동이 어긋날 때, 건강상·정서상의 이유로 이해 속도가 느릴 때, 또 나에게 직접적인 불편을 줄 수도 있는 상황까지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서투름을 개별의 행위 차원이 아니라, 문화적 분위기와 가치관 속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화적, 가치관적 층위가 사건의 순서를 앞지르기 시작하면, 용서의 마음은 점점 줄어들고 작은 서투름에조차 쉽게 화를 내는 사회가 된다.
하지만 타인은 내가 어떤 마음속에서 아침과 밤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사정을 모른 채 단정적인 판단을 계속 더하면, 관계가 생기기도 전에 서로를 지워버리기 쉬워진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무엇을 어떻게 용서해야 할까. 그 답은 너무 넓고 복잡해서, 이 글에서는 다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것이다. 각자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평생 다듬어야 하는 '의지'가 함께 필요한 일이다.
서투름을 받아들이는 일은 아주 작은 순간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내게 그 기억들 속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첫 직장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작은 목소리로 서툰 인사를 건네고 업무를 정리하려 뒤돌아섰다. 그때 들린 짧은 말과, 진심이 담긴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감사합니다."
당시에는 사회 초년생인 내 마음에 간질거림으로만 와닿았지만,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여린 온기가 은근하게 살아있다. 그 뒤로부터 나는 타인의 수고와 노력을 쉽게 잊지 않으려 더욱 애쓰게 되었다.
화려한 대답이 아니어도, 친한 사람이 건넨 말이 아니어도, 어느 날 당신의 마음을 툭 건드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말은 내면에 조용히 새겨지고, 이후 언젠가 자신을 돌아볼 때마다 더욱 부드러운 불빛으로 떠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군가가 그날 겨우 삼킨 밥 한 숟가락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작은 말 한마디가 오래 남아, 가끔은 스스로를 용서하는 마음의 단서가 되기도 한다. 또한 나 역시 용서를 받았을 때, 비로소 타인에게 같은 마음을 건넬 수 있다.
용서는, 어느 순간 두 사람을 함께 살리는 마음의 형태가 된다.
서투름은 사람에게서 떼어낼 수 없다. 우리는 좋은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때로는 완벽하기를 기대하곤 한다. 그러나 좋은 것과 완벽한 것은 서로 같은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이 구분을 놓치면, 스스로에게도 너무 매서워질 수가 있다. 너무 조심스러운 마음이 매번 자신을 다그치지는 않는지도 함께 돌아보아야 한다.
삶은 각자의 고유한 역사다. 그 역사를 이해해 보려는 작은 순간들이 이어지면, 굳어 있던 내 마음도 언젠가 서서히 풀린다. '나도 참 서투른 사람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찾아오고, 그 쑥스러움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