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시작점에 대해 생각하다
나는 사적인 대화를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상대방이 왜 이 말을 했고,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어떤 말이 당신을 스스로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될지 동시에 고민하고 말을 건넨다. 즉, 듣고 싶어 할 만한 본질적인 말을 전하는데 신경이 쓰인다.
사람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대화를 시작할 때가 많다. 스스로 그 마음을 아는 경우도 있고 모른 채 그럴 수도 있다.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함께 있으면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있다. 매번 같은 하소연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반복하는 사람. 또 어두운 농담을 블랙코미디처럼 내뱉는 사람. 당신 스스로를 사랑하고 싶어도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고 둘러싼 삶을 용서하지 못한 채 깊게 파인 상처가 보인다. 그 웃고 있는 모습에도 괜히 가슴이 아프다. 마치 그늘 없는 사막에서 차가워졌다 뜨거워지는 모래 위를 피할 바 없이 구르는 풀덩이처럼.
그러나 나에게 직접 들려주지 않은 생각에 대해서는, 지금의 내가 해줄 수 있는 답장은 기다림이다. 나는 심리와 관련된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냥 당신의 마음을 둘러싼 두꺼운 껍질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해 보인다. 아마도 예리한 정답만을 말한다면 와르르 무너져 내리겠지. 나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 나는 당신이 잠시 쉴 만한 말을 건네고 싶다.
말은 마음의 결의 최종 형태이다. 그 직전에는 표정, 그 직전에는 숨, 그와 동시에 생각, 시작점이 마음이다. 한 사람의 겉모습 안에 그의 평생의 시간이 톱니바퀴처럼 동시에 돌아가고 있다.
나에게 도달한 몇 마디가 당신 안에서 떠다녔던 시간들을 바라보게 한다. 말속에 묻어나는 감정은 그 근원지에서 스쳐 지나가는 향기일 뿐이다. 상대방의 성향에 따라 정도와 해석의 차이는 조금씩 달라지지만, 자신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빙산의 일각을 남에게 다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 복잡한 구조와 이해를 서로 다 마주하지 못해서 과녁으로 자청하지도 않은 서로의 마음에 화살이 박히기도 한다. 스스로에게 소리 없이 몰아붙이는 일도 흔하다. 나를 탓하는 것이 과녁과의 거리가 가장 짧고, 화살이 빗나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말은 단순히 텍스트를 입력하는 것이나 물리적인 파동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체온이 맞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얼굴에서 보이는 온도는 제각기여도 결국 체온은 비슷하다.
물론, 듣는 사람에게도 그 말을 받아들일 틈이 있어야겠지만, 내가 주도해서 그 틈을 만들 수는 없다. 스스로 상처를 마주하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결심이 오랜 시간 반복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이 내 자리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나도 아직은 너무나 조심스러워서, 무언가 더 전해주지 못한 미안함도 계속 남아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도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이렇게나 말이 오가는 과정은 복잡하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텍스트를 밖으로, 또 안으로 전달하고 있을까. 나와 마주 앉은 이에 대해 나는 얼마나 이해하고 말을 건네는 걸까. 나에게 건네는 그 텍스트의 다양한 글씨체가 담고 있는 의미의 결을 떠올려 본다.
습관적으로 스스로에게 건네는 생각들 역시 그저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말의 형태로 스며든다. 예를 들어 "나는 항상 왜 이럴까"라는 문장에 대해서도, '나는', '항상', '왜', '이럴까' 각각에 담긴 모든 세월에 축적된 의미가 너무나 무겁다. 의미가 텍스트가 되는 순간 그 사이에 쌓였던 내 고유한 시간들이 종종 가볍게도 지워지곤 한다.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여유가 없으면 타인에게 온기를 전하기는 더욱 벅차다. 나는 그 무게가 타인을 대할 때 더욱 조심스럽다.
그렇기에 가끔 마주치는 인연일지라도 그 마음이 듣고 싶었던 말의 힌트라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당신의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직접 들려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