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피아노 건반 같은 세상

피아니스트의 전설(2002) 리뷰 에세이

by 서아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공식 스틸컷


. 장르: 드라마

. 등급: 15세 이상 관람

. 러닝타임: 121분

.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 주연: 팀 로스



<The legend of 1900>은 국내 번역 제목이 '피아니스트의 전설'이다. 두 제목은'전설'을 제외하고는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영화를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오래전에 우연히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마음이 너무 먹먹하고 슬퍼서 주인공이 실존 인물이 아님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로 깊은 여운이 있었다.


주인공 '데니 부드맨 T.D 레몬 나인틴헌드레드'는 배에서 태어나, 오로지 바다 위에서만 살아간다. 피아노에 천재적 재능이 있었고, 유람선 내 밴드 활동을 하던 중 '맥스'를 만나 함께 연주하며 둘은 절친한 사이가 된다.


유람선 안에서 그의 연주를 녹음하려던 순간, 창문밖의 한 여인에게 마음이 쏠리고 잔잔한 선율이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다.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아 이 사람은 편지를 쓰듯 진심을 눌러 담아 연주하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연주할 수밖에 없는 사람. 어떤 사람은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움직이지만, 누군가는 너무나 투명해서 무언가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나인틴헌드레드는 후자였다. 숨을 쉬는 것처럼, 그게 당연한 듯이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은 재즈 연주 대결이다. 서로의 연주를 주고받는 동안, 주인공은 짧은 시간 내에 다양한 감정이 출렁인다. 그중에서도, 유람선 밖에서 밀려들어오는 진짜 '세상'에 대한 압도감이 특히 인상 깊다.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한 도시를 연주할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인틴헌드레드의 연주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전 세계에 음반을 판매하자며 제안이 들어오지만 "나 없이 음악만 내보낼 수 없다"라며 거절한다. 그에게 음악은 그대로의 마음을 담아 보내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유한한 88개의 피아노 건반에서 무한한 연주를 할 수 있음이 행복했다"라고. 그에게는 피아노가 세계의 전부였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리의 행복이 마음에서 시작되는지, 상황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생각해 본다. 피아노 연주자로 충분했다던 그에게는, 자신의 연주를 좋아해 주고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진심을 좋아해 주는 데 행복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 그에게 콘크리트로 가득 찬 세상은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산산조각 날 것처럼 어려웠다.


"나를 멈추게 한 건 내가 본 것들이 아니라, 내가 못 본 것들이야"


우리는 이미 바다 위에서 휘청거리듯 항해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저 멀리서는 유한해 보이던 꿈이, 막상 발을 내딛는 순간 머리 위로 무한한 선택과 가치들이 쏟아진다. 그것들을 매 순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무엇이 내 손에 닿을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재즈 같은 삶을 연주한다.


이 영화는 단순히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다. 주인공 자체가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지는 영화였다. 그의 다양한 연주들을 통해 마음이 전하는 의미를 제대로 들을 수 있다면, 이 영화는 오래도록 당신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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