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글쓰기 노동자의 일상기록(11)
“자료조사를 해봤는데 생각보다 자료가 많더라고요. 이 정도면 원하는 만큼 내용을 구성할 수 있겠어요.”
클라이언트,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저었다. 그가 건넨 검색결과 캡처에 수십 개 기사가 나열돼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 기사들은 사실상 하나의 보도자료에서 나온 클론(clone)들이다.
AI에게 자료들을 학습시켜 새 텍스트를 요청하면 어떻게 될까? 로우 데이터가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변형에 불과하므로 개별 단위와 비슷한 분량의 텍스트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충분히 자료가 많다고 생각한 클라이언트가 열 배, 스무 배 분량의 텍스트를 원한다면? 분명 AI는 요청받은 분량을 모두 채워줄 것이다. 다만 대부분이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이라는 것도 각오를 해야 한다.
사람에게 같은 작업을 시킨다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글쓰기 노동자는 클라이언트와 자신의 팔자를 원망하며 없는 말을 지어내 분량을 메울 것이다. 문제는 AI는 사람처럼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눈 뜨고 보지 못할 텍스트를 뱉어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차이는 하나뿐이다. 그나마 논조라도 있는 그럴싸한 거짓말인가, 최소한의 근거와 맥락이 없는 질 낮은 거짓말인가.
문제는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는 거다.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얼핏 많아 보이는 자료가 실제로는 동어반복에 불과한 복제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텍스트가 누군가가 머리를 쥐어짜내 만들어낸 뻥튀기라는 사실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서 글쓰기 노동자가 힘들어하면 그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자료가 이렇게나 많은데 왜 쓸 게 없다는 거죠?”
언제부터인가 나는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자료가 많은 것은 좋은 일이죠. 적다고 해도 걱정하지 마세요. 그걸 메우는 게 작가의 일이니까요. 고객님은 최선을 다해 자료를 모아주시고, 책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후자가 훨씬 중요해요. 방향을 제대로 알려주시면 자료는 저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 자료 찾는 거라면 내가 더 선수다. 그러나 이 말을 귀담아듣는 클라이언트도 흔한 편은 아니다. 텍스트가 필요한 진짜 이유는 사내의 누군가가 원하기 때문이다. 최고경영자나 상관이 원하는 걸 단박에 알아챌 수 있는 하위 직급자가 얼마나 될까? 일단 눈앞에 떨어진 일을 해치우지 않는 회사원은 직위를 유지할 수 없다.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전문업체와 작가를 찾아오는 클라이언트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나는 진심으로 궁금하다. 이런 일이야말로 AI를 시키면 어떻게든 해결될 텐데 왜 굳이 작가를 찾아와 괴로움을 주는 걸까? 내가 받는 원고료는 저 괴롭힘의 대가인 걸까?
괴롭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들을 대신해 내가 AI에게 그 일을 시키면 된다. 나의 괴로움을 AI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AI는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죄의식을 갖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한 후에 나는 클라이언트 앞에서 웃음과 여유를 되찾았다.
가끔 이렇게 묻는 클라이언트도 있다. “이거 AI에게 다 시킨 거 아닌가요?” 물론 나는 그에 대한 대답도 갖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드신다면 AI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AI가 있어도 글쓰기 노동자는 여전히 필요하다. AI의 투박한 거짓말을 감추는 건 아직 사람밖에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AI가 뱉어낸 거짓말 감추기’가 글쓰기 노동자의 유일한 특기인가? 그렇지는 않다. 사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글쓰기 노동자로서의 살 길이 오리지널리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묻는다. 그렇다면, 지금 AI가 써내려가고 있는 이 글들은 뭔가요?
나는 AI가 사고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저 데이터를 조합해 산출한 평균값을 사람들 앞에 ‘생각’으로 포장해 들이밀 뿐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내게 AI는 평균값 산출도구에 불과하다. 이런 면에서는 전자계산기보다도 못하다.
‘1+1’이라는 수식을 던지면 전자계산기는 수학적 연산을 시작한다. 그러나 AI는 계산을 하지 않고 갖고 있는 방대한 데이터 안에서 ‘1+1’이라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단순한 계산도 곧잘 틀리는 게 이런 작동방식 때문이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AI의 ‘사고’다.
이쯤에서 누군가 대답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글쓰기 노동자로서 AI에게 위협을 느껴야만 하는 이유가 뭔가? 그리고 AI의 도움을 회피해야 하는 이유는 또 뭔가?
나는 AI로부터 위협을 느끼지 않고 , 회피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되새길 뿐이다. 글쓰기 노동자의 일은 AI처럼 정보를 복제하고, 그게 아닌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게 아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사안을 해석하고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적 완성까지 못 가더라도 의미적 완성까지는 도달해야 한다.
내가 작업하는 글들은 평가를 끼워 넣기가 조심스러운 경우가 많다. 나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내용을 넣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게 적절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결정권은 온전히 클라이언트가 쥐고 있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공(功)과 과(過)를 가감 없이 수록해주세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내거티브한 내용과 평가가 보이면 불편해 한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돼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된다”는 말로 핑계를 댄다.
그래서 나는 민감한 내용이라 생각될 때는 그 부분을 다른 색 글자로 표시해서 준다. 편집 과정에서 그 ‘빨간줄’이 수없이 사라진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진짜인데, 가짜가 남고 진짜가 사라진다.
기획출판계에는 ‘클라이언트 눈높이에 따라 출판물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족보 없는 격언이 있다. 빨간줄이 자꾸 사라지면 출판물의 가치와 격도 그만큼 깎여나간다. 이쯤 되면 기획자와 편집자, 글쓰기 노동자가 모두 그 책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신이 나는 것은 클라이언트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읽는 데 어려움을 느낄 정도의 내용을 잘 됐다며 만족해하는 촌극이 벌어진다. 이런 원고를 쓰는 게 쉬울 리 없다.
나는 그런 일을 AI에게 시킨다.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 AI야말로 그런 일들의 최적 수행자다. 그걸 들고 나는 가능한 완곡한 방법으로 부끄러움을 지워나간다. AI가 늘어놓는 거짓말을 조금이라도 더 진실에 수렴할 수 있도록 다듬고, 일말의 선의를 추려내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계기로 치환한다. 이렇게 하는 게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하고 덜 괴롭다. 그나마 나의 생각이 담긴 글 비슷하게 된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 노동자의 오리지널리티다.
도둑을 고용해서 ‘의적질’을 하게 만든다면 그건 선(善)이다. AI를 이용해서 좋은 글을 만든다면, 아니 최악의 글을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글쓰기 노동자의 최선(最善)이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