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글쓰기 노동자의 일상기록(12)_ <논나(Nonnas)>
네안데르탈인은 유일한 현생인류 호모사피엔스와 가장 마지막까지 경쟁을 벌인 호모속(屬) 고대인류다. 이라크의 작은 언덕 샤니다르(Shanidar) 동굴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화석은 이들이 고도의 공동체 의식을 가졌음을 드러내 학계를 놀라게 했다.
1957년 발견된 ‘샤니다르 1호’는 한쪽 눈이 멀고, 팔 하나를 못 쓰는 장애의 흔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고대인은 40년 이상 생존하며 자연계가 부여한 호모속의 천수(天壽)를 거의 다 누렸다. 공동체의 적극적인 부양 없이는 불가능했을 생존이었다. 이후 반세기 넘게 이어진 발굴을 통해 10여 기의 화석이 발견됐다. 샤니다르 동굴 주변 토양은 꽃가루 화석이 뒤덮고 있었다. 2020년 추가로 발견된 ‘샤니다르Z’는 얼굴에 왼팔을 괴고, 오른손을 가슴에 얹은 경건한 자세였다. 인류학계의 오랜 논쟁거리였던 네안데르탈인의 ‘꽃매장 가설’에 힘이 실리는 순간이었다.
장례(葬禮)를 치를 줄 안다는 것은 사후세계를 인지한다는 거다. 네안데르탈인은 죽음 너머를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지능이 높았고, 연장자를 예우할 줄 알았다. 다른 동물에게서는 관찰되지 않는 인류종 고유의 특성이다. 네안데르탈인뿐 아니라 호모사피엔스가 구축한 문명 대부분에서 연장자는 예우 받았다. 그러나 이는 본능이 아니다.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고대인류에게 연장자 즉 노인은 공동체가 보유한 ‘살아 있는’ 생존자산이었다. 현재에 비해 과거는 지식의 축적 속도가 극히 느렸다. 후대에 지식을 전승할 마땅한 도구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인류가 문자를 발명해 지식을 보존하기 시작한 것은 길게 잡아야 5000~6000년 남짓에 불과하다. 인류 역사의 99% 이상은 기록되지 않은 구술과 기억의 시대였다. 늙은 개체가 생애를 통해 습득한 지식과 성찰, 즉 지혜의 도움을 얻고 그 일부를 머릿속에 저장하기 위해 인류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예우했다. 살아 있는 동안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썼고, 죽은 후에는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렀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여기서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 <논나>는 이제 막 노모(老母)와 사별한 중년 남성 조(Joe Scaravella)의 상실감으로부터 시작한다. 이탈리아계 뉴요커인 조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유일한 가족의 부재, 평생을 지탱해온 영혼의 허기를 느끼게 했다. 그는 어머니와 논나가 해준 요리를 먹으며 대부분의 생을 살아왔다. 논나(nonna)는 할머니라는 뜻의 이태리어다.
슬픔의 늪에서 허덕이던 조는 어느날 시장을 돌다 낡은 폐업식당을 발견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그곳에 그는 젊고 유능한 셰프 대신 평생 가족을 위해 주방을 지켜온 논나들이 직접 요리하는 식당을 개업하기로 결심한다. 시칠리아(Sicilia)와 볼로냐(Bologna), 평생 이탈리아 음식을 먹으며 살았지만 정작 이탈리아에는 거의 가본 적 없는 다양한 출신과 이력의 논나들이 조의 식당으로 모여든다. 우리로 치면 영·호남을 대표하는 욕쟁이 할머니에 현지 출신 할머니들까지 가세한 LA의 한인식당인 셈이다.
실화를 모티프로 한 영화 <논나>는 대체로 예상 가능한 클리셰를 차곡차곡 쌓으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전 재산을 쏟아부은 조의 자금난과 개성 강한 논나들의 불화, 주변 상인들의 텃새로 폐업 위기까지 몰리지만, 조와 논나들의 식당은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뉴욕 스태튼아일랜드(Staten Island)를 대표하는 명소로 성장한다.
<논나>를 보면서 나는 주인공 조가 아닌 논나들에 집중했다. 그녀들은 이전 세대의 지혜를 지닌 ‘생존자산’들과는 거리가 멀다. 가볍고 철이 없다. 실제로 노인이 철없는 경우는 흔하다. ‘철이 덜 들었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있던 철도 나이가 더 들면 사라진다. ‘도로 애가 된다’는 말이 잘 들어맞는다. 이 말조차 ‘오래 산 사람의 성찰’로 들린다는 게 아이러니다.
클리셰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내게 논나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은 연장자의 역할 변화 때문인 것 같다. 현대사회에서 노인은 더 이상 유용한 ‘생존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젊은 세대보다 가진 지혜가 더 적을지 모른다. 은퇴한 석좌교수가 20대의 학부생보다 더 많은 전문지식을 갖췄다고 이제는 단언하기 어렵다.
사람의 학습능력은 나이를 먹을수록 떨어진다. 날마다 새로운 지식이 태어나고, 지식의 유통기한 또한 이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짧아졌다. 노인의 지식은 낡아 있고, 경험 또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지혜는 축적된 지식과 경험, 그리고 성찰에서 비롯된다. 낡은 지식과 유효하지 않은 경험으로부터 옳은 지혜가 나올 리 없다. 논나들만 봐도 명확하다.
자기 출신 지방의 음식이 최고라고 우기며 싸움을 벌이다 오븐을 태워먹는 논나들의 행동에서 연장자의 성찰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의 논나들은 행복하다. 나는 그 이유를 바뀐 역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들은 참견하거나, 가르치는 대신 직접 요리 하는 길을 택했다.
사람은 지구상 어떤 생물보다도 약한 상태로 세상에 태어난다. 알에서 태어난 병아리는 바로 두 발로 걷지만,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는 데는 적어도 1년 이상이 필요하다. 사회화에 필요한 시간도 계속 길어지고 있다. 19세기 소년공들은 열 살을 넘기기 전에 공장에 투입됐지만, 요즘 그러면 아동학대가 된다. 불과 30~40년 전만 거슬러 올라가도 나이 스물만 넘기면 어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덩치 큰 아이일 뿐이다.
어엿한 사회인 대접을 받으려면 거의 서른 살을 넘겨야 한다.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도 긴 취준생 시절을 거쳐 직장인이 된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과 은행에 취직했던 이전 세대들에 비해 거의 10년은 더 늦게 생산에 참여한다.(물론 나는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특히 한국 사회에서 이 기간이 과하게 길다고 생각한다)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수명은 그보다 훨씬 길어졌으니까. 나의 할아버지는 환갑잔치를 하고 두어 해 만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환갑잔치를 하지 않았고, 팔순을 넘겨 돌아가셨다. 주변 지인들 부모님 대부분이 칠순잔치를 생략했다. 내 세대는 팔순잔치조차 하지 않을 게 거의 확실하다. 큰 병이나 결정적 사고라도 겪지 않는 이상 100세 이전에 죽지 않는 세상이 될 거라는 말이 나온 지 벌써 한참이나 됐다.
세상은 이렇게나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게 있다. 은퇴연령이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종신고용이라는 어려운 미션을 뚫었더라도 보통은 60세를 전후해 직장을 떠나야 한다. 30년을 배우고, 30년을 일하고 나니 할 일이 없어져버린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난제의 원인이 된다. AI시대가 열리면서 많은 직업이 사라지고 있다.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일자리도 많이 만들겠지만 1~3차 산업혁명에 비하면 충분할 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 틈에서 일자리를 지키려는 노인과 그것을 빼앗으려는 청년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미래의 얘기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미 현실 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일이다.
이쯤에서 꼰대가 탄생한다. 꼰대란 더 이상 예우 받지 못하는, 예우해줄 이유가 사라져버린 연장자를 말한다. 사회화 과정에 10년 이상을 더 쏟아부은 현 세대보다 배운 것이 적을 수밖에 없고, 업데이트마저 게을리한다.
유일한 비교우위였던 경험마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데도 당찮은 예우와 존중을 기대하는 사람을 우리는 꼰대라 부른다.
나는 전후(戰後)에 태어난 베이비부머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이 세대를 ‘부모를 부양한 마지막 세대’, ‘후대로부터 부양받지 않는 최초의 세대’로 규정한다. 다른 건 모르겠고 학자들의 예측에서 분명하게 읽히는 게 있다. 후세대에 의해 전세대가 부양받는 시스템은 이제 끝났다. 나이만으로 대접을 받으려 했다가는 꼰대가 된다.
특히 우리나라는 인구피라미드가 뒤집어진 지 오래다. 이제 사람은 오래 살고, 새로운 세대의 개체수는 이전 세대만큼 폭발적으로 늘지 않는다. 나는 이 현상을 이렇게 해석한다. ‘세대부양’이 아닌 ‘세대공존’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앞으로의 세상에서 ‘주류세대’는 없다. 젊은 세대는 절정의 생산력을 갖고 있지만 수가 적고, 나이 든 세대는 생산력은 떨어지지만 전 세대보다 오래 살고, 수가 많다.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데는 수가 많은 쪽이 유리하다.
우리는 지금 경계에 서 있다. 세대부양이 세대공존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두 가지 미션을 모두 완수해야 한다. 첫째, 여전히 일을 해야 한다. 둘째, 누군가를 위해 일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영화 속 논나들이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일을 하는 목적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하지 않는다. 요리를 하는 행위 그 자체와 누군가의 향수를 달래주고, 행복감을 주기 위해 그 일을 한다. 이를 통해 그녀들은 페이 그 이상의 보람과 행복, 긍지를 대가로 얻는다. 굳이 경쟁을 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논나들의 요리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다. 즐거운 놀이다.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그래보였다.
‘인생 2모작’이라는 말이 필수가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퇴 후에 다른 일을 찾는다. 나는 2모작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첫 번째 농사는 충분히 즐거우셨나요? 하기 싫은 일들을 단지 본인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억지로 해온 것은 아닌가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여건이 허락하는 만큼만이라도 즐거워할 만한 일을 찾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비결은 간단하다. 가장 소중한 것을 취하고 나머지 것들을 포기하면 된다. 돈이 더 필요한가? 명예가 필요한가? 존중과 예우가 필요한가? 그게 가장 소중하다면 그걸 얻기 위해 일하면 된다. 대신 젊은 세대와 치열한 경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솔직히 나는 그런 것들이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많건 적건 그것들은 대부분 여태껏 쌓아온 것까지가 한계인 경우가 많다. 인정하자. 그리고 놀자. 더 욕심을 부리면 꼰대가 된다. 운이 좋다면, 이것만으로 조금 더 나은 인생의 성취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고 ‘팔자 좋은 일부 사람들의 얘기’라며 고개를 젓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나 또한 공감한다. 내 주장이 가능해지려면 개인보다는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가 변해야 한다. 하지만 생각하는 게 첫 번째 순서다. 바라지 않는 일은 이뤄지지 않는다. 놀이를 함으로써 일하는 사람보다 적게 얻으나 굶어죽지는 않는 세상, 그게 내가 바라는 최소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