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과학자가 없어도 뇌는 이미 통 속에 있다

by 헤론 베누

만약 우리가 통 속의 뇌가 아니라면? 어떤 미친 과학자가 통 속의 뇌에 전기 자극을 보내 현실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 몰두하다가 인생을 망치고 있는 중이라면? 이런 유머 글이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닌 적이 있다. 유명한 사고실험인 통 속의 뇌를 비튼 농담이다.

이 농담의 원본은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이 제안한 것으로, 내용은 간단하다. 만약 어떤 과학자가 뇌만 통 속에 넣어 두고 신경에 전기 자극을 보내 실제와 똑같은 감각을 만들어 낸다면, 그 뇌는 자신이 가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오래된 철학적 문제로 이어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정말 세계 그 자체일까, 아니면 뇌가 만들어낸 어떤 모델일 뿐일까.

사실 이러한 의문은 큰 의미가 없다. 우리의 뇌는 이미 두개골이라는 통 속에, 수냉식 쿨러가 장착된 채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 통 속의 뇌는 눈, 귀, 피부 같은 감각기관이 보내오는 전기 신호를 바탕으로 세계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내부 모델일 뿐이다.

흔히들 비유하는 것처럼 우리의 뇌가 컴퓨터라고 가정해 보자. CPU는 주변을 볼 수 없다. 마우스와 키보드로 입력된 신호를 받아 처리할 뿐이다. 인간이라고 다를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지금 휴대폰이나 모니터를 보는 것은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뇌로 보내오는 전기신호를 처리하는 것일 뿐이다. 눈이 뇌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외부 감각기관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뇌의 입장에서 보면 눈 역시 마우스나 키보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입력 장치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물론 뇌 밖에 외부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우리가 그 세계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뇌가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감각기관이 보내오는 전기 신호뿐이고, 그 신호를 바탕으로 가상의 세계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인지과학에서는 이 내부의 세계를 "월드 모델(World model)"이라고 부른다. 단어가 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으니 잠깐 짚고 넘어가자.

세계관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세계관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해석의 틀이다. 월드 모델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개념이다. 세계관이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라면, 월드 모델은 "내가 경험하는 세계 자체"를 말한다. 해석이 아니라 경험의 무대 그 자체. 당신이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이 모든 것이 펼쳐지는 그 공간이 월드 모델이다.

월드 모델이라는 개념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지렁이를 생각해 보자. 지렁이는 자아나 생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지렁이는 빛을 피한다. 피부에 있는 감광 세포가 빛을 감지하고, 그 신호를 바탕으로 지렁이의 신경계는 밝은 쪽에서 멀어지는 반응을 만들어낸다. 지렁이의 신경계는 세계에 대한 아주 단순한 내부 표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빛이 있는 곳과 없는 곳. 그게 지렁이의 세계다. 아주 단순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월드 모델이다.

물고기는 조금 더 복잡하다. 수압의 변화, 수온, 빛의 방향, 주변 물고기들의 움직임. 이 모든 것들을 통합해서 지금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행동한다. 포식자가 접근하면 도망치고, 먹이가 보이면 접근하고, 같은 종의 개체들과 무리를 이룬다. 이 행동들이 가능하려면 세계에 대한 내부 모델이 있어야 한다. 어떤 것이 위험하고, 어떤 것이 유익하며,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파악하는 내부의 지도가 필요하다.

진화의 역사를 이런 시각으로 보면 흥미로운 그림이 나온다. 생명체가 점점 복잡해져 온 것은, 어떤 의미에서 월드 모델이 점점 정교해져 온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자아라는 것은 월드 모델이 충분히 복잡해졌을 때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창발되는 무언가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인공지능 연구에서도 같은 개념이 도입되고 있다. 세계에 대한 내부 모델을 스스로 구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행동을 계획하는 AI. 연구자들은 이것 또한 월드 모델이라고 부른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와서, 인간의 월드 모델은 지렁이나 물고기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복잡하다.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을,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다룬다. 물리적인 세계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세계도 담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을 담는다.

각각의 인간은 자신만의 월드 모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자신의 월드 모델 하나만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외부 세계도, 타인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이 월드 모델 안에서 처리되고 해석된다. 당신이 지금 경험하는 이 세계, 주변 사람들, 오늘 있었던 일들, 당신이 누구라는 감각. 이 모든 것이 당신의 뇌가 만들어낸 내부 세계 안에 있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당신의 친구도 자신의 월드 모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모델 안에도 세계가 있고, 사람들이 있고, 당신이 있다. 그런데 당신은 그 모델에 접근할 수 없다. 당신이 경험하는 당신의 친구는, 당신의 월드 모델 안에 구성된 친구의 모습이다. 친구가 웃을 때 당신은 그 웃음을 보지만, 그 웃음이 친구의 내부 세계에서 어떤 의미인지는 직접 알 수 없다. 당신은 그 웃음을 자신의 월드 모델 안에서 해석할 뿐이다.

이것은 단순히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일상의 아주 구체적인 장면에서 나타난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고 해보자. 당신의 뇌는 즉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아니면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아니면 그냥 바쁜 건가? 이 과정에서 당신은 친구의 행동을 보고 그것을 자신의 월드 모델 안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친구에 대해 당신이 알고 있는 것들, 관계의 역사, 비슷한 상황에서의 과거 경험, 이 모든 것을 동원해서 설명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설명은 결국 당신의 해석이다. 친구의 내부 세계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당신이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해라는 것도 사실은 이런 과정이다. 타인의 내면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말과 행동을 자신의 월드 모델로 해석하는 과정. 우리는 타인을 자신의 세계 안에서 설명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누군가를 깊이 이해한다고 느낄 때, 그것은 그 사람의 내부 세계에 접근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내부 모델이 정교해졌다는 뜻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일까? 모든 관계는 결국 오해와 해석의 반복일 뿐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놀랍도록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몸, 비슷한 감각기관, 비슷한 뇌의 구조. 우리 모두 중력이 있는 세계에서 살아왔고, 비슷한 음식을 먹고, 비슷한 방식으로 아프고, 비슷한 방식으로 즐거움을 느낀다. 이 공통된 조건 덕분에 각자의 월드 모델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완전히 같지도 않지만, 대체로 비슷한 방향으로 수렴한다. 마치 같은 사과를 보고 각자 그 색깔을 다르게 느끼더라도 "저건 빨간색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완벽하지 않지만, 함께 살아가기에 충분할 정도로.

하지만 그 이해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 그리고 그 한계가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서로의 배경이 달라지기 시작할 때다.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거나, 다른 신체 조건을 가졌거나, 그 외에도 서로 매우 다른 삶의 경험을 가졌거나. 이런 경우 월드 모델의 차이가 커지고, 해석의 오차가 커진다. 같은 말을 해도 다르게 들리고, 같은 행동을 해도 다르게 보인다. 이것이 이해가 어려워지는 지점이다. 공감 능력의 한계가 아니라, 구조적인 차이의 문제다.

그래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완전히 같은 월드 모델을 가질 수는 없다. 우리는 각자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고,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겪어왔기 때문이다. 그 차이가 때로는 좁혀지지 않는다. 오해가 쌓이고 관계가 틀어질 때, 그것이 반드시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 있다. 서로의 월드 모델이 달랐을 뿐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경험하는 "나"는, 내 뇌가 만들어낸 "나"의 모습이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자기 인식은 왜곡되기 쉽고, 자신의 동기나 감정을 오해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해석하고, 그 해석이 정확하지도 않다. 자기 자신도 결국 자신의 월드 모델 안에 있는 존재다.

그래서 이해하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자신에 대한 해석조차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 더 정확한 해석을 만들어가려는 노력. 상대의 말과 행동을 더 많이 보고, 더 오래 듣고, 자신의 해석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이해라는 불완전한 행위를 그나마 덜 불완전하게 만드는 방법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세계를 경험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월드 모델로 끝없이 해석하려 할 뿐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끝없는 시도 자체가, 인간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