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고 싶지만, 지워지지 않는"
그녀는 일주일에 세 번 이곳을 찾았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항상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차를 마신 적이 없었다.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 돌아갔다.
진이는 그 모습이 이상했다.
기억을 놓고 가는 손님도,
지우기 망설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녀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어느 날, 진이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기억을… 지우러 오신 건가요?”
그녀는 진이를 보며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아주 조용히 대답했다.
“지우고 싶어서 왔는데,
매번 그 목소리가 나를 따라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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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는 천천히,
유리창을 타고 내리는 빗물처럼 흘러나왔다.
“그 사람을 떠난 지… 2년이 됐어요.
그날 이후, 같은 꿈을 꿔요.
밤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꿈속은 언제나 어둡다.
불 꺼진 방 안,
무거운 숨소리.
그리고
그 사람의 목소리.
“왜 나를 버렸어?”
그녀는 말한다.
꿈속에선 언제나 그 말만 들린다고.
‘왜 나를 버렸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왜 나를 미워했어.’
“그 사람은 나를 죽이지 않았어요.
근데… 그 목소리가
이제는 나를 죽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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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책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녀의 전 연인이었고,
마지막 순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별 직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갑게 등을 돌렸고,
다신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사람의 부고를 들었다.
“장례식에도 못 갔어요.
갈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웃었다.
처음이었다.
진이가 이 카페에서 그런 슬픔을 웃음으로 감싸는 사람을 본 건.
“사람들은 말해요.
그 사람의 선택은 나 때문이 아니라고.
그건 그 사람의 삶이라고.
근데… 나는 알아요.
내가 그 사람의 마지막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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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 조용히 다가와
라벤더 차 한 잔을 그녀 앞에 놓았다.
“이 차는 기억을 천천히 녹여요.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게 가라앉게 해줍니다.”
그녀는 조심스레 컵을 들었다.
차의 온기가 손끝을 타고 번졌다.
“이걸 마시면…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될까요?”
은은 고개를 저었다.
“그 목소리는, 당신 안에 있는 죄책감이에요.
목소리를 없애는 건
기억을 버리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그 목소리를
잠깐만 조용히 해볼게요.”
그녀는 한 모금 마셨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창밖이 아닌
진이와 은을 바라봤다.
“이곳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적어도…
어딘가엔 내가 무너지지 않고 앉아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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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진이는 카페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녀는 기억을 버리진 않았어요.
그런데도 조금 나아진 것처럼 보여요.”
은은 찻잔을 닦으며 답했다.
“때로는, 기억을 지우지 않아도 돼요.
고요히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아주 조금, 살아갈 수 있으니까.”
진이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기억을 먹는다는 건,
꼭 무언가를 버리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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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날 이후로
일주일에 한 번만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창밖이 아닌,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