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안녕
비가 오는 날이었다.
천장의 조명도 오늘따라 희미하게 느껴졌다.
진이는 그날의 카페가 유난히 무거운 공기로 가득 차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문이 열렸다.
우산도 없이 젖은 남자가 들어섰다.
말없이, 숨을 쉬듯 자리로 걸어왔다.
그리고 앉자마자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기억을 버리러 왔습니다.”
말투엔 주저함이 없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깊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스스로를 설득하며 말하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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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조용히 앉아 물었다.
“어떤 기억을요?”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형이 있었어요.
두 살 위.
어릴 땐 사이가 좋았고,
나중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갔죠.”
그는 컵에 손을 올렸다.
차가 오지도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손을 얹은 채 계속 말했다.
“나는 형이 싫었어요.
언제나 잘나갔고,
엄마 아빠도 형만 믿었고.
나는 항상 비교당했죠.”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수십 년이 쌓인 분노와 슬픔이 뒤엉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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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넘어서도
형을 보면 나는 작아졌어요.
웃는 얼굴을 보면 미웠고,
잘 살고 있는 모습이 질투났죠.”
그러던 어느 날,
형과 큰 말다툼을 했다.
지금까지 쌓였던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나는 그날,
형에게 너무 심한 말을 했어요.
태어나서 한 번도 그렇게까지 독한 말은 해본 적 없을 정도로.”
그리고,
형은 다음 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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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는 그날 이후,
거울도, 사진도,
사람들 얼굴도 못 봐요.”
그는 말하고 있었다.
지우고 싶은 건 기억보다도
그날 형의 마지막 얼굴,
그날 형에게 남긴 마지막 말.
“장례식장에서 형 얼굴을 못 봤어요.
보면…
그 순간이 떠오를까 봐.
내 말 때문에 그렇게 된 건 아닐까 봐.”
그는 봉투를 밀었다.
그 안에는 낡은 핸드폰이 들어 있었다.
형과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핸드폰.
그 안에 남아 있는 건
그날의 통화 기록,
그리고 형이 보낸 단 하나의 문자.
“괜찮다. 늘 네 편인 거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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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 말없이 계피 생강차를 내렸다.
따뜻하고도 알싸한 향이
공기 속으로 천천히 퍼졌다.
“이 차는,
차가워진 가슴을 데워주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끝까지 남아 있죠.
마치 용서처럼.”
그는 차를 받아 들고 입을 닫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진이는 처음으로 그의 어깨가
조금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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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괜찮다 했어요.
마지막 말이 그거였어요.
근데…
나는 괜찮지 않아요.
내가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요.”
진이는 조용히 말했다.
“그 기억을 버리는 게 아니라…
그 말을, 이제 당신이 믿어야 할 때가 아닐까요?”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감은 얼굴 위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후회였고,
사랑이었고,
그리고
용서를 받아들이고 싶다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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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진이는 일기를 쓰며 펜을 잠시 멈췄다.
생각했다.
용서란, 상대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게 허락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형은 그를 용서했을 것이다.
죽기 전 마지막 말처럼.
그렇다면
남은 일은 단 하나.
그가
스스로를 용서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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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카페 테이블에 남겨진 핸드폰 하나가 있었다.
누군가 그것을 조용히 두고 갔고,
그 안의 메시지는 모두 삭제되어 있었다.
은이 그걸 보고 말했다.
“기억을 버린다는 건,
말하지 못했던 안녕을
비로소 전하는 일일지도 몰라요.”
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조용히 말한 안녕은,
어쩌면 형에게도,
자신에게도 처음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