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는 이름 옆에 "
비가 오는 아침이었다.
진이는 평소보다 일찍 카페에 도착했다.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 너머로
누군가가 서 있었다.
흰 셔츠에,
머리엔 작게 올린 단정한 업스타일.
신부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그날 결혼식장에서 뛰쳐나온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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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합니다.
기억을 놓고 가도 되나요?”
그녀는 아주 또렷한 눈빛으로 물었다.
어딘가 초점이 나간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주 단단하게 닫혀 있었다.
진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런 기억을 버리기 위해 여기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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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말없이 작은 종이 가방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웨딩슈즈 한 짝과
하객들에게 나눌 예정이던 청첩장이 수십 장 들어 있었다.
“오늘 오전 11시.
제가 입장하기로 한 시간이에요.”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대신 나는,
그 시간에
이곳에 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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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아무 말 없이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말은 천천히 시작됐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았고,
부모님도 반대하지 않았고,
회사에서도 축하해줬고.”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살다 보면 정이 사랑이 된다잖아요.
그래서 믿었어요.
결혼이라는 게 그런 거라고.”
하지만
그 믿음은
그녀 자신에게는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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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하루 전날 밤,
거울 앞에 서 있는데
내가 너무 낯설었어요.”
입가엔 웃음을 그려야 했고,
드레스는 꼭 맞아야 했고,
하객 명단은 완벽해야 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건 없었다.
바로 내 마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과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옆에 놓이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도망쳤다.
“드레스를 입고는 뛸 수 없으니까
셔츠 하나 걸치고 나왔어요.
휴대폰은 꺼두고,
택시를 타고,
마지막으로 이곳이 떠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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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 오늘따라 말없이 차만 내렸다.
캐모마일.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는 가장 부드러운 향기.
그녀는 컵을 들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비난하겠죠.
철없다고,
책임감 없다고,
자기 감정 하나 못 다스린다고.”
진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아니요.
당신은 지금,
당신 인생의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을 했어요.”
그녀는 한 모금 마셨다.
떨리던 손끝이 아주 조금 진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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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도 아마
어느 순간 알게 됐을 거예요.
내가 웃을 때 눈이 슬프다는 걸.”
그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엔 정말 웃고 싶어서 웃는 듯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누구인지는
알아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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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청첩장 중 한 장을 꺼내
뒷면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고 카페 책장 사이에 슬그머니 꽂아두었다.
진이가 몰래 확인했을 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다시는 누군가의 이름 옆에
내 이름을 억지로 나란히 놓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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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진이는 혼잣말을 했다.
“어떤 이별은
만나기 전에 일어나는지도 몰라.
그리고 어떤 결혼은
사랑보다 외로움에 지는 경우도 있고.”
그녀는 그 외로움에 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그녀는 도망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으러 나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