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같은 자리에 앉는 할머니

"평생 지켜온 자리"

by 미라니

카페 문이 열리기 전, 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창밖 벤치에 늘 같은 시간 앉아 있던 그 할머니가 오늘은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다.

매일 그 자리에 앉아 창문 너머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 조용히 일어나 돌아가던 사람.

오늘은 그 발걸음이 문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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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며 들어온 공기에는 오래된 옷에서 풍기는 먼지 냄새와 국물 같은 따스한 향이 섞여 있었다.

할머니는 천천히, 그러나 망설임 없이 은이 있는 카운터 앞으로 다가왔다.


“여기가… 그 기억을 먹는 곳인가?”

쉰 듯한 목소리였지만, 또렷했다.


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내주었다.

진이는 얼른 따뜻한 차를 내왔다.

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공기를 채우자, 할머니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잔을 감싸쥔 손이 조금씩 떨리며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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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 자리를 지켜왔어.

시장의 국밥집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심지어 공원 벤치에서도.


남편이 떠난 뒤로는 더 그랬지.

아이들이 다 자기 살림을 차린 뒤에도 나는 어디서든 자리를 찾아앉았어.


빈자리를 두면 안 될 것 같았거든.

누군가는 그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

그게 내 몫이라고 여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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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눈을 내리깔며 작게 웃었다.

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쓸쓸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남편이 떠난 날도, 사람들 틈에서 앉아 있었어.

사람들이 다녀가고 의자가 비어 있으면, 그 빈자리가 나를 삼킬 것만 같았지.


그래서 나는 늘 거기에 있었어.

자리를 지키고, 또 지키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가 지켜온 건 사실 자리가 아니라 공허였다는 걸 알았어.

그걸 알면서도 손을 뗄 수가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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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 종이를 꺼내 조용히 적기 시작했다.

‘빈자리를 지켜온 세월.’

글씨가 잉크에 번져 작은 얼룩이 남았다.


은은 그 글자를 접어 잔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종이가 물 위에서 천천히 풀려 흩어졌다.

유자 껍질을 잔 위에 올리자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이제는 그 자리를 버리고 싶으신가요?”

은의 물음에 할머니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리를 내가 붙들고 있었던 거야.

이제는 좀 놓아도 되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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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을 입술에 대는 순간, 할머니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차분히 가라앉았다.


종이가 사라진 물은 맑아 보였고, 유자 향은 가볍게 퍼졌다.


마지막 한 모금을 삼킨 뒤 할머니는 잔을 내려놓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신기하네. 그동안 나를 붙잡던 자리가… 잘 떠오르지 않아.

벤치도, 의자도, 그 빈자리를 메우던 나의 모습도.

마치 오래된 그림자를 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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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버린다는 건 공허를 지우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길을 놓는 일이지요.”


할머니는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에는 아직 남은 주름과 세월의 무게가 그대로였지만, 그 속에서 한층 가벼워진 빛이 번졌다.


“오늘은… 자리를 지키지 않아도 될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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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낡은 가방을 둘러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나서면서도 창가의 벤치를 돌아보지 않았다.

곧장 길을 건너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진이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정말… 자리를 버리고 가신 걸까요?”

진이가 조용히 묻자 은은 대답 대신 공책을 펼쳐 한 줄을 적었다.


‘자리를 버린다는 건, 나를 기다리게 하던 과거를 비워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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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무거운 기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건 유자 향과 아직 다 흐르지 않은 모래시계뿐이었다.

은은 그 향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또 다른 기억이 찾아올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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