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기 위한 시작"
카페 문이 열리자 찬 바람이 먼저 밀려들어왔다.
문간에 서 있는 사람은 아직 젊어 보였지만, 그의 어깨는 오래된 짐을 짊어진 듯 축 처져 있었다.
한 손에는 두툼한 원고뭉치가 들려 있었고, 다른 손은 계속해서 손끝을 움켜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는 자리를 잡자마자 원고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겉표지는 수없이 고쳐 쓴 흔적과 지운 흔적들로 얼룩져 있었고, 종이 모서리는 손때와 세월에 눌려 있었다.
아무리 지우개로 문장을 지워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흔적이 남는 것처럼, 그의 표정에도 지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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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을 쓰는 게 가장 어렵다고들 하죠. 그런데 저는… 첫 문장만 쓰다가 멈추곤 합니다.”
그가 낮게 말을 꺼냈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은 쓴 것 같아요. 그런데 쓸 때마다 다시 지워버려요. 지우고 또 지우고… 결국 남는 건, 시작조차 못 했다는 공허함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손끝은 원고지 가장자리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그 원고가 손에서 놓이면 자신도 함께 부서질 것 같은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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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무엇을 그렇게 지워야 했나요?”
남자는 대답 대신, 맨 위 장을 천천히 꺼내 펼쳐 보였다.
거기엔 단 한 줄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날, 그녀에게 하지 못한 말을 여전히 붙잡고 있다.”
종이에는 여러 번 글씨를 눌러 쓰고, 지우고, 다시 적은 흔적이 가득했다.
지우개 가루가 스며든 듯한 얼룩이 줄마다 흩어져 있었고, 문장은 흐릿했지만 오히려 더 깊은 상처처럼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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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떠났습니다.”
그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날을, 그 말을, 이 첫 문장을 놓지 못합니다.
다른 글을 쓰려고 해도 결국 이 문장으로 돌아와 버려요.
그래서 글을 쓰는 게 두렵습니다. 시작은 언제나 같고, 끝내는 다르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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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 그의 고백을 들으며 조용히 잔을 준비했다.
뜨거운 물 위로 찻잎이 풀려나며 향이 퍼져갔다.
그 향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겁던 공기를 조금은 누그러뜨렸다.
“지워야만 했던 첫 문장은, 사실 당신이 지울 수 없는 기억이었겠지요.”
은은 그렇게 말하며 종이를 꺼내 단 한 줄을 적었다.
‘지우려 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기억.’
종이는 잔 속에서 천천히 풀려나가며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가에 아주 희미한 빛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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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는 카운터 뒤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의 손에 쥐어진 원고와, 그 안에 남아 있는 문장이 마치 자신의 마음 한쪽과도 닮아 있는 것 같았다.
진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워낸다는 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깊게 각인되는 건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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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잔을 다 비우고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숨을 고른 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원고를 품에 안았다.
여전히 얼룩진 표지는 그대로였지만, 그의 뒷모습에는 아까보다 한결 가벼운 기운이 감돌았다.
“오늘은… 다시 써봐야겠습니다.”
그가 문 앞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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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문이 닫히고 고요가 돌아왔다.
남자가 남기고 간 잔 위에는 아직도 김이 가늘게 피어올라 있었다.
은은 모래시계를 뒤집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워야만 했던 첫 문장도, 결국은 다시 쓰기 위해 남겨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