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문틈 사이로
비가 오는 아침이었다.
진이는 평소보다 일찍 카페에 도착했다.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 너머로 희미하게 비친 가로등 불빛이, 아직 잠에서 덜 깬 마음을 어루만졌다. 문을 열자 은은한 커피 향이 고요한 공기를 감쌌다. 은이가 이미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진이 씨가 더 먼저 왔네요.”
은이가 웃으며 말했다.
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오래전 잊었다고 생각했던 무언가가 자꾸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듯 스며들고 있었다.
커피잔을 손에 쥐자, 미세한 떨림이 손끝으로 번졌다.
“오늘은… 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진이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은이는 아무 말 없이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진이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기억이 다시 불려 올라오는 듯했다.
---
진이는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의 한 여름을 떠올렸다.
그날도 비가 오고 있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이상하게 커서, 방 안에 혼자 있는 게 무서웠다. 엄마는 약속이 있다며 늦게 온다고 했고, 아빠는 출장을 갔었다.
집 안은 적막했다. 텔레비전 화면엔 번쩍이는 번개가 비치고, 그 불빛이 벽지를 스치며 움직였다. 진이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 순간,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금방 지나갈 거야.’
처음엔 엄마 목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그날 이후 진이는 종종 그 목소리를 들었다.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목소리가 있을 때면 조금은 덜 외로웠다.
그러다 어느 날, 진이는 그 목소리를 따라 집을 나섰다.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신발은 젖었고, 손엔 인형 하나를 꼭 쥐고 있었다. 기억은 그곳에서 끊겼다.
눈을 떴을 때는 경찰 아저씨 품 안이었다. 엄마가 울고 있었다.
그날 이후 진이는 그 목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했다.
그게 첫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잊지 못했다.
---
“그 목소리가 늘 저를 부르는 것 같았어요.”
진이는 잔잔하게 말했다.
“그게 사람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제 안의 또 다른 나였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카페에 들어왔을 때 그 목소리를 다시 들은 것 같았어요.”
은이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진이의 눈가에는 어느새 맺힌 물기가 반짝였다.
“여기 들어올 때, 문을 여는 순간 그 냄새가, 그 빛이, 그 말이… 다 그날 같았어요.”
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이의 앞에 조용히 머그잔을 놓았다.
커피 위에 떠오른 하얀 거품이, 마치 그 기억의 파편처럼 흔들렸다.
“기억은 잊히지 않아요. 다만, 우리가 다시 꺼내보지 않을 뿐이에요.”
은이의 목소리는 낮고 따뜻했다.
“진이 씨의 첫 기억이 아픈 이유는, 그 기억 속의 진이가 아직도 그 비 오는 날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에요.”
진이는 고개를 숙였다.
커피 향이 코끝을 스치고, 그 향 속에 오래된 빗내음이 섞여 있었다.
“그 아이를 데리러 가야겠네요.”
진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은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게 오늘의 주문이겠네요.”
---
진이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의 빗소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문 뒤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듯했다.
괜찮아, 이제 그 기억을 버려도 돼.
진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그날의 자신을, 처음으로 미소 지으며 떠나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