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없는 하루

by 미라니

눈을 뜨자, 방 안이 고요했다.

새벽의 공기가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햇살이 커튼 사이로 흘러들며 바닥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나는 한참 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다.

오늘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무언가를 잊은 듯했지만, 그게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볍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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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자, 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천천히 흔들리고, 먼지가 햇살 속에서 반짝였다.

그 작은 빛의 조각들이 공중에서 춤을 추는 걸 보고 있자니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나는 커피를 내렸다.

은이 씨의 카페에서 배운 대로,

뜨거운 물을 천천히, 둥글게, 조용히.

커피 향이 퍼지는 순간,

문득 그곳의 공기와 종소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오늘은 그 향을 붙잡지 않았다.

그저 스며들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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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예전이라면 다이어리, 메모, 일정표가 잔뜩 쌓여 있었을 텐데

이제는 비어 있는 공간이 오히려 좋았다.

나는 그 위에 종이 한 장을 올려놓고,

조용히 펜을 들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 줄만 적었다.


“오늘은 그냥, 살았다.”




그 한 문장에 모든 게 담겨 있었다.

후회도, 슬픔도, 그리움도.

그리고 무엇보다 — 평온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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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무렵, 나는 동네 산책로를 걸었다.

햇빛이 따뜻했고, 벚꽃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사람들은 웃으며 지나가고,

아이들은 서로를 부르며 달려갔다.


나는 그들 속에서 아무 역할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외롭지 않았다.

어쩌면, 기억이 사라진다는 건

‘나’라는 무게가 잠시 비워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비워진 그 자리에, 새 공기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공기 속에서 나는,

다시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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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어 창가에 앉았다.

노을빛이 벽에 번졌다.

커피잔에는 미지근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손으로 그 잔을 감싸 쥐었다.

그 순간, 아주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이제 다 지나갔어.”


나는 미소를 지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제 나는

기억 속의 내가 아니라,

기억을 지나온 나로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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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는,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 ‘아무 일도 없음’이 내게는 기적이었다.

나는 잊지 않았다.

다만, 그 기억이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을 뿐이다.


커피 잔을 비우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어둑해지고, 별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인사했다.


“은이 씨, 하연 씨, 그리고 나.”

“모두 잘 지내죠?”


창밖의 바람이 대답처럼 살짝 흔들렸다.

나는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 “기억이 없다는 건, 잊었다는 뜻이 아니라,

드디어 마음이 고요해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펜을 놓았다.

밤이 완전히 내려왔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웃었다.


오늘은 기억이 없는 하루였다.

그리고, 나는 평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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