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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나는 종종 먼 하늘을 보며 막연한 상상을 하곤 했다.
“나는 어른이 되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때의 나는 어른이란 존재가 특별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척척 해내고,
나이만 먹으면 저절로 지혜가 차오르는 줄 알았다.
결혼은 누구와 할지도 참 궁금했다.
“혹시 우리 반 3번, 그 친구일까?”
하지만 그 친구는 내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귀여운 착각이었다.
나이가 들면 돈도 많고, 멋도 있고, 뭐든 통달한 어른스러움이
나에게 온다고 상상했다.
마흔의 나는 성공해 있을 줄 알았고,
쉰의 나는 아마도
인생을 내려다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의 시간은 내 상상 따위는 묻지도 않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조금만 천천히 가자.”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시간은 귀가 없었다.
어느듯 이순(耳順)을 훌쩍 넘긴 지금, 나는 손녀를 안고 있다.
손녀는 내 손가락 하나 잡고도 ‘세상 다 가진’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다.
“아, 내가 그토록 예견했던 어른의 모습은 이게 아니었는데.”
어릴 적 나는 화려한 미래를 꿈꾸느라 상상 속의 현실을 외면했고,
막상 어른이 된 현실의 나는 치열하게 사느라 그 시절의 상상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데도 이상한 건,
계획대로 된것은 하나 없는데
결국 내 삶은 어느새 꽤 근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뜰살뜰한 아내가 있고,
자식들은 제 몫을 다하며 가정을 꾸렸고,
손녀가 있고, 곧 손자도 태어난다.
당초 꿈꾸던 모습과는 숫자도, 모양도, 확률도
전혀 맞지 않지만
이것이야말로 정말 현실이 된 ‘최고의 상상’이 아닐까.
이제야 깨닫는다.
어릴 적 나는 나이를 먹으면 ‘어른’이 저절로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어른이 된다는 건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되는 건 아니었다.
현실은 그저, 물리적인 나이만 정직하게 차곡차곡 쌓일 뿐이었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계획이 틀어지고 계산이 빚나가도
" 아. 인생이 또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하며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는 기술을 익혀가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손녀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린다.
“아가야, 할아버지도 아직 배우는 중이란다.”
그리고 곧 태어날 손자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 같다.
“ 꿈은 마음껏 꾸되, 그 꿈대로 되지 않는다고 슬퍼마라.
때로는 상상보다 현실이 훨씬 더 흥미롭고 따뜻할 수도 있으니까."
시간은 여전히 빠르다. 그래도 괜찮다.
그 빠른 시간 속에서 나는 사랑을 얻고, 가족을 얻고,
어느새 삶의 맛을 알게 되었으니까.
비록 어릴적 그리던 찬란한 그림이 아닐지라도 괜찮다.
세월이 내려앉은 주름진 손으로 행복을 만질 수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나는 참 좋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