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고무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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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로

사람 둘이 사는데, 참 많기도 하다. 설거지통에는 그릇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먹다 남긴 김치 몇 조각, 생선 가시, 아침에 끓인 콩나물국 흔적까지.

평소 같으면 맨손으로 대충 치웠을 텐데, 오늘은 바람이 차서 손끝이 시렸다.

식기세척기 손잡이에 걸어둔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물을 틀었다.

아내가 사 둔 친환경 세제를 수세미에 꾹 눌러 묻히고

그릇 바닥까지 둥글게 빙 둘러 닦기 시작했다.

기름기 한 줌, 쌀알 하나라도 남아 있지 않게 구석구석 훑다 보면

이 작은 동작이 내 마음 한쪽까지 씻겨 나가는 느낌이 든다.


싱크대에 튄 물기도 마른행주로 조심스레 닦았다.

물 얼룩 없이 반짝거리는 스테인리스는 오늘 내가 한 일 중

유일하게 ‘성취’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 만큼 반짝였다.


정리된 선반을 바라보던 순간, 문득 가을 도로변에 떨어져 있던 은행잎이 떠올랐다.

누군가 이른 새벽에 깨끗이 쓸어냈던 그 풍경처럼,

정리란 결국 눈앞의 어수선함을 치우는 동시에

마음속 군더더기를 비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아내가 가게를 운영한 지도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다.

나는 쉬는 날엔 설거지를 미뤄두라고 아내에게 늘 말한다.

그게 우리 부부 사이에 오래전부터 자연스레 만들어진 약속이다.

아내도 고마워하고, 나도 그럴 수 있음에 마음이 편하다.

의무라기보다는 서로의 하루를 조금 가볍게 해주는 작은 습관 같다.

아내는 끼니마다 몇 개 되지 않는 그릇도 바로바로 설거지하는 편이다.

나는 그 성격을 오래 봐와서 굳이 고치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성격 덕분에 아내의 하루가 모나지 않고 가지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미루어 두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나는 몸이 영 개운치 않았다. 입맛도 없어서 겨우

허기를 달래듯 끼니를 때우고

침대에 누워 영상만 휙휙 넘기며 시간을 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래도 시간은 슬그머니 흘러가 버린다.

참 얄궂다 싶었다.


오후 한 시.

결국 점심은 먹어야 해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무 무침, 된장찌개, 콩나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남은 밥에 참기름 몇 방울, 고추장 한 숟가락을 얹어 비벼 한 입 넣자

매운맛이 금세 혀를 깨웠다.

그 짧은 순간만큼은 아침의 무기력도 잠시 잊었다.


하지만 눈앞에 놓인 빈 그릇들은 나를 다시 현실로 불러 세웠다.

아내가 돌아올 즈음 부엌은 깨끗해야 한다.

그것도 우리가 나눠 가진 작은 약속이니까.

물을 다시 틀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저녁은 아내가 좋아하는 돼지 수육을 해볼까.


아침부터 종일 늘어져 있던 내가

오늘 하루를 보람 있게 마무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같았다.

옛날 군대에서 부르던 군가,

“보람찬 하루 일을 끝 마치고서.”

그 한 줄이 괜히 귓가에 떠올랐다.

부드럽게 삶아 기름기만 살짝 걷은 따뜻한 수육 한 접시.

그리고 말끔히 정돈된 부엌.

아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그 풍경이 오늘 내 하루를 대신 말해줄 것이다.


서툴지만 정성을 꾹꾹 눌러 담아 쌓아 올린 하루.

빨간 고무장갑에서 시작해

저녁의 수육으로 완성되는 작은 안부 같은 하루 말이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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