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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봉호 Sep 09. 2023

공간의 재발견 : 시네큐브

2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작은 외삼촌은 열혈남아였다. 성정이 급하고 술을 즐기다 보니 이런저런 사건사고에 휘말리기도 했다. 벌이는 사업마다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내게는 오랜 친구 같은 존재였다. 20대 시절, 명동길에서 우연히 만났던 그가 왜 그리 반가웠을까. 눈빛만 봐도 관심의 농도를 알 수 있는 게 인간관계다. 어릴 적부터 작은 외삼촌을 따랐다. 덕담과 함께 골목길로 사라지던 그의 뒷모습이 선명하다.  


   수집벽은 취향저격자의 특징이다. 여기에 가장 큰 변수가 비용이다. 가수 엘튼 존은 단종된 자동차 수집이 취미다. 부피가 엄청난 실물 자동차를 모으다 보니 런던 외곽지역에 고가의 자동차를 보관하는 건물까지 소유했다. 역대 5위에 해당하는 음반판매고를 자랑하는 팝스타만이 가능한 취미가 아닐까 싶다. 한 편 그는 수천 개에 달하는 안경을 모으는 비교적 소박한 수집벽도 있다. 


   연평균 150편에 달하는 영화를 감상하며 A4 크기의 영화포스터를 모은다. 포스터 수집 기준은 블록버스터가 아닌 특정관에서만 개봉하는 작품에 주목한다. 때문에 일반 극장에 가도 원하는 포스터를 얻기가 수월하지 않다. 어머니는 작은 외삼촌의 취미가 나랑 같았다고 전했다. 아쉽게도 그가 모았다는 포스터를 직접 구경하지는 못했다. 지금과는 다른 재질과 문장으로 만들어진 포스터로 기억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퇴근 무렵에 인근 극장에 들리곤 했다. 제일 자주 방문한 극장이 광화문 시네큐브였다. 2,000년 개관한 이곳의 주인은 백두대간이라는 수입배급사였다. 여타 예술전용극장처럼 운영난에 고전하던 끝에 6년 후에는 대기업에서 운영을 떠맡는다. 시네큐브는 디지털극장이 대세이던 때에도 2개 상영관 모두에서 2013년까지 필름상영을 고수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시네큐브에서 본 영화는 셀 수 없이 많다. 직장동료와 함께 본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즈>에서부터 코엔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에 이르는 100여 편의 영화를 시네큐브에서 조우했다. 일본영화주간에는 하루 4편을 몰아서 보았다. <녹차의 맛>,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 등이 기억난다. 정재은 감독의 <태풍태양>과 <말하는 건축가>도 빼놓을 수 없다. 


  이 극장은 영화자막이 사라질 때까지 조명을 꺼둔다. 영화애호가를 고려한 운영진의 철학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내가 수집한 포스터의 절반 이상을 시네큐브에서 구했다. 영화를 감상할 시간이 모자라면 포스터만 챙기는 일도 빈번했다. 따라서 포스터만 구하고 아직까지 챙겨보지 못한 영화도 수두룩하다. 유료영화사이트를 뒤져도 구하기 어려운 작품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구정연휴 전날로 기억한다. 회사일을 마치고 일과처럼 시네큐브에 방문했다. 영화제목은 <아타나주아>였다. 착석과 동시에 전날 회식의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순백의 설원이 펼쳐지는 초반부터 정신줄을 놓았다. 코 고는 소리에 잠을 깨 보니 주변에 3~4명의 관객만이 보이더라. 코골이의 주인공은 나였다. 3시간에 달하는 <아타나주아>는 초반부의 지루함이 후반부의 눅진함으로 변하는 수작이다.   


   시네큐브의 또 다른 매력은 관객친화적인 구조다. 올해로 24년을 운영했는데도 지하에 위치한 극장으로 향하는 2중 계단에서부터 정서적인 안정감을 준다. 널찍한 극장 외부는 작품에 미리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다. 적당히 어두운 조명으로 영화관에 입장하기 전부터 마음을 보듬어준다. 영화와 공간의 중요성을 함께 배려한 아름다운 공간이다. 영화를 시작하고 10분이 지나면 관객입장을 제한했던 기억도 있다. 


   20년이 넘는 광화문 직장생활이 마포로 바뀌면서 시네큐브에 가는 일이 뜸해졌다. 신촌 아트레온과 필름포럼 위주로 방문하면서 시네큐브는 작은 추억으로 남았다. 지난주에 정동에서 선약이 있었다. 예정보다 30여분 일찍 출발해서 포스터를 구하러 시네큐브를 찾았다. 소파에 앉은 10명 남짓한 관객이 작품을 기다리고 있더라.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시네큐브만의 풍경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작은 외삼촌은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서 당신과의 기억을 찬찬히 되살려 보았다. 그는 하늘에서 영화와 함께 외롭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그가 애써 모았던 포스터는 지금 누구의 공간에 놓여 있을까. 내가 모으는 포스터는 훗날 어떤 이의 공간에서 살아갈까. 파일철에 수집한 포스터를 들춰본다. 이는 시네큐브라는 고즈넉한 공간이 제공한 인연의 흔적이다.       



< 공간의 재발견 : 시네큐브 광화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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