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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봉호 Oct 02. 2023

여행의 재발견 : 루가노

1부 헤르만 헤세의 산책길 

   


   작가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고 말이다. 그에게 여행이란 거부할 수 없는 화두다. 밀어내려 해도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일종의 그림자 같은 것.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는 작가의 글쓰기 같은 것. 나는 어떤 형태의 여행을 마음속에 그리며 살아왔을까. 


   사실 여행이란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지다.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시간, 돈, 건강 3가지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여행이란 하룻밤의 꿈에 불과하다. 따라서 여행을 떠나는 누군가를 부러워하지 않는 자는 없다. 누구나 여행을 원하고 오래도록 여행지에 머물기를 바란다. 외국여행 자체가 불가능한 세월이 있었다. 유튜브에서 여행동영상을 시청하며 역병이 사라지기를 고대했던 어둠의 시간이었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코로나19가 터지기 직전에 스위스로 떠났다. 세상이 차단된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2019년 늦가을이었다. 스위스 여행의 가장 큰 걸림돌은 비용이다. 노르웨이에 버금가는 고물가로 유명한 나라가 스위스다.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예산을 줄이는 대신 체류기간을 늘리거나 다음 여행을 준비하는 방식을 택했다. 배낭여행에도 가심비가 엄연히 존재한다. 


   고민하던 차에 여행복권에 덜컥 당첨되었다. 인터넷 항공사이트에 취리히행 직항노선 티켓 2장이 등장했다. 거기에다 국내항공사에서 내놓은 티켓이었다. 유류항공세를 포함하여 왕복 78만 원에 결제를 완료했다. 취리히행 국내항공 편도티켓이 200만 원에 달하던 때였다. 아내가 매일 티켓을 검색하다 찾아낸 금쪽이였다. 그렇게 출발 4개월 전에 잡은 티켓으로 여행일정을 확정했다.  


   목적지는 취리히, 루체른, 루가노, 인터라켄, 슈비츠, 쿤, 이젤발트, 체르마트, 제네바, 로잔, 몽트뢰, 바젤로 잡았다. 이동수단은 기차로 하고 숙소를 검색했다. 대부분의 유럽국가처럼 11월 초는 비수기로 접어드는 시기다. 따라서 10월과 비교해 숙소비용이 30%까지 저렴해진다. 여기에 선결제 할인을 완료하면 절반까지 가격이 내려간다. 마음에 드는 숙소를 고르기 위한 결정이었다. 


   한 달 넘게 에어비앤비와 호텔스닷컴을 뒤져 숙소예약을 완료했다. 다음은 교통수단이다. 스위스는 기차여행이 최적화된 나라다. 기차역에 내려서 도보로 관광이 가능한 지역이 많다. 한국 인터넷 장터에서 할인가에 스위스패스를 잡았다. 기차, 트램, 버스, 유람선, 박물관, 고성까지 입장이 가능한 스위스패스는 체류기간별로 가격이 다르다. 이제 배낭짐을 챙길 일만 남았다. 


   공항 근처에서 1박을 하고 취리히 근방의 루체른으로 향했다. 사실 다음 여행지인 루가노는 큰 기대가 없었다. 언급한 도시 중에서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장소였다. 언덕에 위치한 루가노역에 내리자 그간의 선입견이 진눈깨비처럼 사라졌다. 작은 산과 호수로 이루어진 루가노는 동화의 세계처럼 시야를 어루만진다. 언덕을 내려오면 단풍나무가 멋들어진 루가노 호숫길이 여행객을 맞이한다.


   숙소에 짐을 풀고 서둘러 헤세의 산책길을 찾아 나섰다. 느린 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를 걸었을까. 작은 산길을 돌고 돌아 헤세의 현수막이 걸린 건물과 마주한다. 그가 노년에 글을 쓰던 장소다. 수줍은 미소를 보내는 노부부와 마주친다. 그들은 내게 헤세의 산책길을 설명해 준다. 창작이란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이다. 헤세는 루가노에서 얼마나 많은 상념과 고뇌에 빠지곤 했을까.  


   다시 헤세의 산책길에 입장한다. 좁지만 아늑한 길을 걸으며 그의 작품을 하나둘씩 꺼내본다. 아프락사스가 등장하는 <데미안>, 이성과 감성의 진혼곡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자전소설 <황야의 이리>가 먼저 떠오른다. 그는 창작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 구원을 갈망했을 것이다. 때로는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작가의 일상에 침잠하면서, 세상을 바꿀 수 없는 범인의 실체에 좌절하면서. 


   스위스 남부에 위치한 루가노는 이탈리아와 마주하고 있다. 따라서 번화가에 다다르면 곳곳에서 이탈리아어가 들린다. 국경에 접한 도시에서 드러나는 풍경이다. 헤세는 분명 루가노 호수의 벤치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흘러간 젊은 날을 떠올리고,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선택을 아쉬워했을 것이다. 루가노에 밤이 깃들었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헤세는 그렇게 적었다.    

  


< 여행의 재발견 : 루가노 헤세 뮤지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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