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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봉호 Sep 26. 2023

공간의 재발견 : 페이스북

8부 이타적 친구의 출현 



  현대인에게 공간이란 어떤 의미일까. 공간을 실체로만 제한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문화는 생필품 같은 존재로 자리 잡았다. 하루에 수십 번씩 드나드는 앱(어플)이야말로 인류가 만들어낸 현실의 공간이다. 여기에 역병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가세한다. 화상회의, 재택근무, 배달문화의 일상화로 누군가를 직접 만나는 일이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한다. 


  마크 저커버그 CEO는 2019년 조지타운 대학교 연설에서 페이스북 사용자를 제5계급이라 명했다.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겠다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는 2021년 들어 자극적인 정치적 게시물에 관한 재재를 선포한다. 미 연방의회 의사당 폭동을 부추킨 트럼프는 페이스북에서도 운영중지를 당한다. 트위터에 이은 두 번째 SNS 손절사태였다. SNS는 정치운동의 명암을 좌지우지할 도구가 되었다. 


  코로나19 사태 직전에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페이스북은 2021년 하반기에 메타(Meta)로 명칭을 바꾼다. 마크 저커버그는 소셜 미디어를 넘어 가상현실(VR) 같은 영역으로 확장한다는 의도임을 설명한다. 하지만 내게는 페이스북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하다. 어쨌거나 블로그,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이은 4번째 소통수단이 생긴다. 이미지와 동영상 비중이 높은 인스타그램을 접고 페이스북에 시간을 투자하기로 했다. 


  반응도가 높은 페이스북에 빠지자 트위터에도 관심이 줄어들었다. 페이스북에 대중문화 피드를 매일 챙겼더니 2년 만에 팔로워가 3,000명 가까이 모이더라. 세상은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으로 직진하는 중이었다. 유행이란 이런 것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인스타그램에 이어 틱톡이 대세다. 조만간 틱톡을 누를 신매체가 등장할 것이다. 전성기를 누린 팝스타처럼 신매체 역시 내리막으로 향할 것이다. 


  페이스북의 매력을 생각해 보자. 힐링에 가까운 공감댓글, 자고 일어나면 늘어나는 따봉(좋아요), 비슷한 취향끼리 모아주는 시스템이 먼저 떠오른다. 잠시도 페이스북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설계했다는 증거다. 여기에 중독 기능을 추가했다. 인정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관종 퍼레이드가 그것이다. 이는 페이스북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부분의 SNS에서는 모든 가입자의 관종화를 유도한다. 


  이를 극복하지는 못하지만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만난 적이 없는 페친과 실제로 만나보는 방식이었다. 페친을 전부 만날 수는 없으니 비슷한 또래 중에서 소통이 원활했던 인물을 택했다. 예상대로 실제 이미지는 페이스북에서와는 많이 달랐다. 그들 역시 내 이미지에 대한 차이를 발견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20여 명의 페친을 만나 보았다. 2~3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괴리감이 존재했다. 


  ‘오프라인에서 만나보기’ 프로젝트는 지금도 유효하다. 장점도 있다. 온라인에서 가졌던 느낌보다 괜찮은 페친을 만날 경우다.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평소 알고 지내던 이가 페이스북에서는 마치 벼락부자처럼 행세하는 경우다. 술자리에서는 자본주의를 비난하지만 사이버 세계에서는 돈 많은 한량 행세를 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SNS가 낳은 작은 비극의 현장이다. 


   SNS를 이용하는 목적은 개인차가 극명하다. 사업수단, 가게홍보, 여가수단 등이 예다. 여기에 친목도모라는 생태적인 요소가 근간을 이룬다. 시비성, 야유성 댓글은 차단기능을 사용하면 간단히 해결된다. 싫어도 봐야 하는 온라인상의 인간관계와는 차이가 있다. 그러다 보니 끼리끼리 문화가 만들어진다. 다른 의견에 대한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다. 집단논리의 단점은 다양성의 무시와 탄압이다. 


   페이스북을 통해 맺어진 인연들. 오프라인에서 만난 이후 멀어진 이들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아무리 SNS 기능이 발전한다 해도 실제 모습과 동떨어진 관계는 껍데기에 불과하니까. 페친 중에서 절반 가까운 이들이 음악애호가다. 음악에 관한 피드를 자주 올리다 보니 생긴 일이다. 이 공간에서 새로운 음악을 만나고 인연을 맺어간다. 이름만 알았던 유명 예술가와 소통하는 일도 적지 않다. 


   요즘은 새로운 매체에 글을 올리느라 페이스북에 소흘 해졌다. 관종에 관한 거부감도 한몫을 했다. 인정욕구를 넘어 관종욕구를 향해 달리는 사람들. 어쩌면 글쓰기도 관종욕구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적당하면 이해해 주지만 지나치면 비난받는다. 모든 SNS 개발자는 가입자의 영혼을 지배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기업가치과 자신의 명성과 연봉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SNS라는 공간에 입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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