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공을 열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다
“돈 좀 벌어야겠다.”라고 내가 말했다. “돈 벌어서 말라고?”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편이 물었다. “맛있는 것도 실컷 먹고.”라고 대답하자 남편이 웃음을 터뜨렸다. “맛있는 거 있긴 있나?” “왜 없어. 한 끼에 오십만 원짜리도 먹고 백만 원짜리도 먹어봐야지.” “고기를 먹나 생선을 먹나. 먹을 줄 아는 게 있어야지. 오십만 원짜리든 백만 원짜리든 먹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다는 것을 자각한 날, 남편과 나눈 대화다. 그날 나는 살아 꿈틀거릴 수 있어 좋았다. 눈을 크게 뜨고 텃밭 가장자리에 있는 편백나무와 민들레 꽃과 상추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뭉클거렸다. 편백나무와 상추와 민들레 꽃이 내 눈 속으로 쓱 끌려왔다. 망막에 찰싹 달라붙었다. 텃밭의 식물들이 철로 된 것이 아니고, 내 눈 속에 자석이 들어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눈 속으로 끌려온단 말인가. 망막에 찰싹 달라붙는단 말인가. 작은 돌멩이조차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자석에 이끌리듯 눈길이 작은 돌멩이로 이끌려갔다.
어느 날 다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일렁거렸다. 살면서 뭘 누렸나 생각해 봤다. 아무것도 없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지만 말이야. 사는 동안, 이 세상 실컷 누리고는 가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남편에게 툭 던진 말이 “돈 좀 벌어야겠다.”였다. 돈이 많아야 세상을 실컷 누리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남편의 말처럼, 난 고기와 생선을 먹지 않는다. 산해진미가 놓여 있는 백만 원짜리 밥상 앞에서도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풀잎 몇 장뿐이다.
우리가 백만 원짜리 밥상 앞에 앉았다 치자. 곧바로 숟가락을 들고 허겁지겁 먹어치운다면, 백만 원짜리 밥상을 누린 거라고 할 수 없다. 그냥 배를 채운 거지. 어떻게 하면 백만 원짜리 밥상을 누렸다고 할 수 있을까. 우선 어떤 음식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다음엔 음식마다 어떤 재료가 들어있는지 모양과 색깔도 살펴보고 냄새도 맡아봐야 한다. 음식에 들어있는 재료가 누가 어디서 키웠는지는 물론이고 어디를 거쳐 왔는지도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또 각 재료가 어울려 어떤 맛을 낼지 상상도 해보아야 할 것이다.
또 음식을 어떤 순서로 먹으면 더 맛있을지도 알아봐야 한다. 먹기 전에 잊지 않고 추억 사진을 찍었다고 하자. 또 음식 하나하나를 혀끝으로 음미하면서 먹었다고 하자. 그래도 끝이 아니다. 이 음식이 있기까지 수고해 준 이들과 맛있는 음식을 만든 이에게 감사 인사 한마디 했다고 해서 백만 원짜리 밥상을 누렸다고 할 수 없다. 햇빛과 물과 바람과 구름 그리고 땅이 없었다면 이 음식이 있었겠는가. 백만 원짜리 밥상을 누렸다고 하려면 우리의 밥이 된 벼가 느꼈을 햇빛과 물과 바람과 구름을 느껴 봐야지 않겠는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 있는 말이다. "내 집 앞마당에 부는 바람이 모공 하나하나 스쳐 간다네. 내가 곧 죽는다고 생각하면 코끝의 바람 한 줄기도 허투루 마실 수 없는 거라네."
바람이 모공 하나하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는 이어령과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는 사람 이 둘 중에서 누가 이 세상을 더 많이 누리는 사람일까? 물론 이어령이다. 우리가 힘든 일을 겪을 때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하는가?”라는 부정적인 질문은 이 세상을 누릴 수 없게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누리려면 “생명이 어떻게 어렵고 힘든 일을 겪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되묻는 질문이 필요하다.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인식했을 때였다. 잠을 자고 일어나 세수하고 밥을 먹는 소소한 일상이 기적임을 깨닫게 되었다. 가족이나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활동 또한 기적이란 걸 느꼈다. 심지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까지 신비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곧 돌멩이조차 못 보게 될 테니까. 돌멩이라도 모두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두고두고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내가 세상을 누리는 데는 백만 원짜리 밥상이나 풀잎 몇 장의 간소한 밥상이든 상관없다. 내가 밥상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우주를 볼 수도 있고, 단지 밥상만을 볼 수도 있다. 밥상 앞에서 우주를 보는 사람이 이 세상을 충만하게 누리는 사람일 것이다. 또 벼의 뿌리를 보듬어 준 흙처럼. 내가 다른 사람을 감싸 안아주는 다정한 사람이 되어간다면, 이 또한 세상을 충만하게 누리는 일일 것이다.
내가 세상을 누리기 위해서 할 일이 돈을 버는 일일까? 아니다. 이어령처럼 모공을 하나하나를 열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는 일이다. 길을 가다 만난 돌멩이를 어루만지는 일이다. 내가 먹고 자고 일어나서 세수하는 것을 세심하게 알아차리는 일이다. 내가 지금 머리 위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가족이나 다른 사람과 함께 무언가를 하는 나를 지켜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