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가게 글월을 읽고
오디오북 편지 가게 글월(백승연,스토리플러스)을 듣고 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인 편지 가게 '글월'은 실제로 서울 연희동과 성수동에 있다고 한다. 검색해 보니 정말 있다. 한번 가보고 싶다.
주인공 효영이는 영화감독의 꿈을 접는다. 공부 잘하던, 집안의 자랑거리이던 언니가 사기를 당했다. 이후 엄마가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까지 했기 때문에 가정 경제가 어려워져서다. 언니는 집을 나가 사라졌다. 언니는 효영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내온다. 효영은 그런 언니를 용서하지 못한다. 언니의 편지를 피해 서울로 도망친다. 하필 서울에서 하게 된 일이 대학 동기가 운영하는 편지 가게 글월이다. 효영은 대학 동기이자 글월 사장 선호와 단골손님 웹툰 작가 영광과 글월에서 편지를 쓰는 여러 손님들과 교류하면서 성장한다.
오디오북을 듣는 내내 따뜻한 온기를 몸으로 느꼈다. 삶의 고통을 다른 사람과 직접적으로는 나누는 것은 어렵다. 속내를 일일이 타인에게 쏟아낼 수는 없으니까. 이때 마음을 담은 편지가 한몫을 한다. 글월 손님들은 누가 읽을지도 모르는 편지 한 통을 써 놓고 대신 누가 쓴지도 모르는 편지를 선택해 읽는다.
두 물체를 문지르면 열이 발생하듯. 수신인과 발신인이 누군지 모르지만 이때도 따뜻한 온기가 발생한다. 이 온기로 인해 서로 연결되고 이 연결이 삶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해 준다. 언니의 편지를 피해 달아났던 주인공 효영이와 언니인 효민이와 편지로 인해 연결되고 글월 손님들도 서로 편지를 통해 연결된다.
우체국 직원인 주혜가 처음 쓴 펜팔 편지를 효영에게 읽어봐 달라고 한다. 효영이는 마음을 담아 쓰면 된다고 부담 갖지 말라며 거절한다. 주혜는 마음을 쓰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 같다며 읽어 달라고 다시 부탁한다.
편지 내용은 이렇다. 하루 종일 서류와 종이박스를 만지는 일을 한다. 손의 수분이 날아갈 뿐 아니라 부석부석 종이가루가 묻는다고. 집에 와서 뜨거운 수건으로 손을 찜질하고 핸드크림을 바른다고. 핸드크림만은 가장 좋은 것을 고집한다고. 집 회사만 오가 어떤 취향도 없다고. 좋은 취향을 만드는 방법 알려주면 좋겠다고 효영은 속으로 생각한다. 고생한 자기 손을 위해 좋은 핸드크림을 사는 것이 바로 취향이라고, 취향은 나를 향할 때 탄생한다고.
아무런 취향이 없다란 말과 집 회사 집 회사만 오간다는 주혜의 말이 마음에 꽂혔다. 나도 학교 다닐 때는 학교 집 학교 집, 직장 다닐 때는 직장 집 직장 집, 주부일 때는 집 시장 집 마트를 오가는 게 전부였으니까.
요즘도 좀처럼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큰맘 먹어야 공원 산책을 나갈 수 있다. 내게도 취향이 있는지 알아보고 취향을 하나 가져볼까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디오북이다 보니, 종이책과 달리 부분 부분을 다시 듣고 또다시 들어야 글로 옮길 수 있었다. 여러 번 다시 듣다 보니, 편지는 마음을 담아 쓰면 된다는 효영이의 말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마음을 담는 일이라는 주혜의 말이 마음에 스멀스멀 파고들었다. 효영이가 편지는 마음을 담아 쓰면 된다고 한 말은 주혜에게 한 말이지만, 언니에게 편지를 못 쓰는 효영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하다. 또 내가 새겨 들어야 할 말이기도 하다.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 보내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본다. 편지에 마음을 담는 일이 정말 어려운 일인지를. 마음이 없어서 편지에 마음을 담지 못하는 건 아닌지를. 마음이 있는데 뭔가가 가로막고 있어서 마음이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는 지를. 맘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 맨손으로 밤송이 까는 일이다. 며칠 굶어 죽을 지경이라면 가시에 찔리든 말든 맨손으로 밤송이를 까지 않겠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쓰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절실하지 않아서 일 것이다.
주혜는 마음을 담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하면서도 편지에 마음을 담아 썼다. 편지를 안 써서 편지에 마음을 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손에 볼펜을 쥐고 편지지 위에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기만 한다면, 마음이 팔을 타고 손을 타고 흘러내려 볼펜을 적실 것이다. 그러면 편지에 마음이 담기지 않을 수 없다. 편지를 쓰는 것 이외에 마음을 편지에 담을 방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