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욕망의 산물이다. 그 욕망을 충족하려면 누구나 무無에서 시작해야 한다. 단 하나의 인문학 지식도 유전으로 물려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뇌가 생물학적으로 진화해 자신을 이해하려는 욕망을 버리지 않는 한, 인문학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유시민/돌베개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청소년기 때 일어난 내 속의 이 욕망은 강렬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왜 여기에 살고 있는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는 못 살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고 철학책을 읽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어떤 철학책은 어려워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나를 이해하는 일이 만만하지 않은 이유를 유시민 작가는 이에 대한 지식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無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은 무슨 일을 하는데 매뉴얼이 없다는 것이다. 매뉴얼 없이 일을 하면 간단한 일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복잡한 일일수록 중간중간 일을 망치지 않을 수 없다. 망친 곳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이는 헝클어진 실타래를 잡아당겨 더 헝클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호모 사피엔스의 뇌 속에 자신을 이해하려는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도 예외일 수가 없다.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하려는 욕망을 버릴 수 없었다. 이 욕망을 버리거나 잠재울 수 있었다면 단순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은 잠자지 않는다. 언제든 다시 끌어 오를 기회를 노리고 있다. 자꾸만 끌어 오르는 나를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나는 헝클어진 실타래를 잡아당기고 잡아당기면서 살아왔다.
처음에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으며 왜 여기 존재하는지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었다. 이 사실을 모르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철학책을 읽을수록 생각할수록 뜬구름 잡는 것 같았다. 손에 잡히는 실체가 없어 마음은 점점 더 괴로웠다.
지구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려고 관찰한다고 하자. 현미경을 갖다 대고 흙을 관찰하고 땅 속의 벌레의 알과 눈과 더듬이와 다리를 아주 세밀하게 관찰했다고 하자. 그리고 나무 잎과 줄기와 뿌리와 껍질을 아주 세세하게 관찰했다고 하자. 지구에 있는 동식물과 흙과 바위의 세세한 부분을 현미경으로 다 관찰했다고 하자. 이런 관찰로 지구를 알 수 있을까?
지구가 어떤 것인지 알려면 먼저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천체 망원경으로 지구가 우주의 공간의 어디쯤 존재하는지와 다른 별들과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크기는 얼마가 되는지 밝기는 얼마인지 등을 알아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차츰 가까이 다가오면서 산과 강과 바다와 사막을 살펴보고 나무와 풀과 동식물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현미경으로 땅속 벌레를 관찰하는 일은 맨 나중에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나를 알기 위해 한 일들은 지구를 알기 위해 제일 먼저 현미경으로 애벌레의 다리의 털을 관찰하는 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숲해설가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이 덕에 자연과 동식물에 관한 책을 좀 읽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이 책들은 흥미로웠고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자연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자연에 대한 이해력이 생겼다.
숲해설을 하는 중이었다. 한 분이 질문했다. 이 분은 과수원을 한다고 했다. 많은 사과나무 중 한 그루가 해마다 꽃이 별로 피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더 정성껏 가꾸었지만 계속 꽃이 적게 핀다고 했다. 같은 땅에다 다 같이 보살피는데 왜 이 사과나무만 유독 꽃이 적게 피는지 그 이유를 내게 물었다. 몇 년 동안 지켜본 사람도 모르는 이유를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모르겠습니다."가 아니라 완전 다른 말이었다.
"여성들 중에도 임신이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잖아요. 여성마다 임신이 안 되는 이유가 각각 다르지요. 여성호르몬이 너무 적게 나오거나 나팔관이 막혀서, 난자가 미성숙해서, 자궁벽에 문제가 있어 수정란이 정착이 잘 되지 않은 경우가 있지요.
사과나무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사람의 경우에는 유전적으로 임신이 어려운 경우가 있고 생활 습관이나 환경으로 인한 불임이 있을 수 있지만요. 그 사과나무는 다른 사과나무와 주변 환경은 다 같잖아요. 주변 환경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혹시 그 사과나무는 꽃을 많이 피울 수 없는 몸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아서 꽃이 적게 피는 게 아닐까요?"
질문을 한 사람은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과나무를 뽑아내고 다른 사과나무를 심어야겠다고 했다. 뽑혀 생을 마감할 사과나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와 동시에 과수원 하는 사람은 사과를 더 많이 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과나무에 대한 미안함을 달랬다.
사람들은 다람쥐가 숨긴 도토리를 다 찾지 못해 영리하지 못하다고 한다. 나는 왜 다람쥐가 영리하게 진화하지 않은지 그 이유를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다람쥐가 숨긴 도토리를 다 찾지 못하는 것이 다람쥐에게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다람쥐는 영리하게 진화하지 않은 것이다.
다람쥐가 영리해서 숨긴 도토리를 다 찾아 먹는다고 하자. 다람쥐는 도토리를 숨기거나 찾는데 몸을 많이 움직일 필요가 없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점점 몸놀림이 느려진다. 천적이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순간, 다람쥐는 재빨리 달아나지 못해 죽을 확률이 높아진다. 영리하지 않은 뇌는 다람쥐의 몸을 단련시켜 주는 트레이너다. 목숨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다람쥐가 찾지 못해 흙속에 있는 도토리는 싹이 나고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된다. 이 나무가 맺은 도토리는 이 도토리를 숨긴 다람쥐의 후손이 먹을 양식이 된다. 다람쥐의 영리하지 않은 뇌는 후손 다람쥐들이 굶어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유산을 물려주게 하는 지혜를 탑재하고 있다.
다람쥐가 영리하지 않은 이유를 나 나름대로 깨달았듯,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식물과 곤충의 삶에 대해 유추해 보고 생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이것이 내가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이전 달리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다람쥐가 다른 다람쥐와 누가 더 영리한지 우열을 따져 무얼 하겠는가. 사람은 사람과 누가 더 영리한지를 따질 뿐 아니라 심지어 다람쥐와도 누가 더 영리한지 우열을 견준다. 다람쥐와 우열을 견주지 않는다면 다람쥐는 다람쥐가 살아가기에 알맞은 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다람쥐가 영리하지 못해 숨긴 도토리를 다 찾아먹지 못한다고 하는 말이 얼마나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나온 말인가.
나는 숲해설가로 활동하면서 현미경 렌즈로 나를 들여다보는 일 같은 짓을 멈췄다. 대신 먼 하늘과 강과 바다와 산을 바라보았다.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숲과 강과 바닷속에 사는 나무와 풀과 곤충과 동물을 바라보았다. 하늘과 강과 산과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쌓여감에 따라 나무와 풀과 곤충과 동물을 바라보는 내 관점이 달라졌다.
다람쥐를 인간의 잣대로 영리하지 못하다고 평가하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다람쥐는 다람쥐의 삶을 산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도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동식물이 없으면 인간은 살 수 없지만 동식물은 인간이 없어도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더 잘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나도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생각해 보라. 다른 생명체에 기대 살아가는 존재가 자신이 기대는 생명체보다 낫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어느 날 이 생각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생각인지 깨닫고선 혼자서 얼굴을 붉혔다.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서 내가 호모 사피엔스 중 하나로 이 지구에 태어났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이 앎으로 인해 나를 이해하고 알고 싶은 욕망이 마음속에서 사그라들었다. 대신 어떻게 호모 사피엔스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란 질문이 자리 잡았다. 다람쥐가 인간의 영리함을 닮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듯 나도 다른 사람의 영리함이나 멋짐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어차피 알 수 없는 것이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다람쥐가 사람의 영리함을 닮으려고 애쓰는 일 같지 않기를 바란다. 처음엔 다람쥐가 도토리를 숨기며 살면 그만이듯 나도 호모사피엔스가 해야 할 일을 하며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 일이 참 간단해 보이지만 간단하지 않았다.
다람쥐는 어떤 다람쥐든 도토리를 숨기며 살아도 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따라 하는 일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게 문제다. 지금 세상은 온갖 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내가 그것을 제대로 인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내가 꽃을 많이 피우지 못한 사과나무처럼 태어났을 수 있다. 나 자신이 다른 호모 사피엔스와 좀 다르게 태어났을 수도 있다. 이 사실을 알아도 문제, 몰라도 문제다. 이를 알게 되기 전에는 왜 나는 이렇게 다를까 고민한다. 자신이 좀 달리 태어난 것을 알면 왜 이렇게 태어났냐며 한탄한다.
나는 꽃을 많이 피우지 못하는 사과나무처럼 태어났든, 다른 사람과 조금 달리 태어났든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호모 사피엔스가 해야 할 마땅한 삶 따위에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삶 앞에 배짱 한번 내밀어 보기로 했다. "살던 대로 살든 달리 살든 그게 뭐 어떻다고! 삶아 네 대답 한번 해 봐라! 살아있으면 되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