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
김익한 교수와 함께 하는 도전 100독 다섯 번째 책
오십에 읽는 논어를 읽고
우리는 단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아야지라는 말을 종종 한다. 사람들이 사람답지 않게 사는 사람을 향해 던지는 말이다. 오십에 읽은 논어를 읽으면서는 단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산다는 문장을 읽을 때 이런 물음이 생겼다. '나는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선 우선 사람답게 사는 어떤 것인지 정의부터 해야 한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사람마다 다르게 정의할 것이다. 사랍답게를 각자 달리 정한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각자 자신이 정한 사람답게에 도달하면 되니까.
우리는 자신이 정의한 사람답게 살아낼 수 있을까? 같은 행위를 두고도 어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았고, 어떤 사람은 사람답게 살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사람답게 산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답게 살지 못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았다고 여길 수 있다. 또 우리가 사람답게 살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란 질문에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고도 할 수 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안도현 시인의 시 '너에게 묻는다'가 최종엽 작가에게 질문을 던졌듯 내게도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웠느냐'라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그 무엇에게라도 뜨거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한 번 뜨겁게 살아보자 작정했다. 오늘 오십에 읽는 논어를 읽다가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뜨거웠던 적이 없다. 사람답게 살았다고 하려면 연탄처럼 한 번은 활활 타올라야 하는데.
어릴 때 연탄재를 발로 툭툭 차며 놀았다. 연탄이 깨지면 위에 올라가 팍팍 뛰었다. 연탄재가 갈라지고 바스러지면서 점점 작은 알갱이로 변해 갈 때 마음속에 어떤 희열 같은 감정이 피어올랐다. 한때 김국환의 우리도 접시를 깨자라는 가요가 유행적이 있다. 사람은 무언가를 만들 때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파괴하면서도 즐거움을 느끼는 종족인 것 같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였다. 부엌 아궁이 두 개에 한 곳에는 큰 가마솥 다른 한 곳에는 작은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작은 방에는 나무를 때는 아궁이가 있었다. 엄마가 나무하는 게 힘들다고 연탄을 때자고 했다. 그래서 작은 방 아궁이를 고쳐 연탄으로 난방을 하였다. 연탄불이 꺼져서가 아니라 연탄을 갈려고 할 때 연탄이 깨져서 다시 불을 붙여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엄마가 연탄을 갈 때 지켜본 바로는 연탄을 갈기 위해 연탄을 집게로 들어 올릴 때 깨지는 경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연탄 불이 구멍 아래에서 꺼질 듯 사라져 가고 있을 때다. 이때 연탄은 회색이고 보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처럼 보인다. 연탄집게를 연탄구멍 사이에 넣고 들어 올리면 연탄이 힘 없이 갈라지면서 깨진다. 이때는 아래로 부서지면서 아래로 내려앉은 연탄을 퍼올려야 한다. 그런 다음 연탄에 새로 불을 붙여야 한다.
연탄을 갈려고 할 때 깨지는 또 다른 경우다. 연탄을 갈려고 연탄구멍에 집게를 넣고 연탄을 집어 올리면 아래와 윗 연탄에 붙어서 같이 올라온다. 연탄아궁이 바람구멍을 열어 놓아서 연탄불이 파란 불꽃을 내며 활활 탔을 경우다. 아래위 연탄이 살짝 붙었을 경우엔 집게로 탁 치면 떨어진다. 하지만 위아래 연탄이 착 달라붙은 경우엔 살살 치면 안 떨어지고 세게 치면 연탄이 깨지고 만다. 이때도 번개탄으로 연탄불을 새로 붙여야 한다. 처음으로 연탄아궁이에 불을 때기 위해 번개탄에 불을 붙이던 것을 보았을 때였다. 번개탄에서 허연 연기가 나면서 불꽃이 화르르 일어나는 광경이 신기하고도 놀라웠다.
뜨뜻 미지근하게 타다 말아도 연탄은 깨진다. 활활 불타올라도 연탄을 깨진다. 재가 된 연탄이 깨지지 않으려면, 적당한 온도로 타야 한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삶을 뜨뜻 미지근하게 불 태울지, 적당하게 불태울지, 활활 불태울지를. 각자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좋은 것이지, 어느 것은 좋고 어느 것은 좋지 않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살아있는 동안 한 번은 활활 타는 경험을 하고 싶다. 그런데 나이가 칠십이 되도록 활활 탄 적이 없다. 지금이라도 적당하게 혹은 뜨뜻 미지근 살고 싶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내가 아직도 활활 타는 경험을 하고 싶은 것이 문제다. 활활 타오른다고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연탄아궁이 속 아래위 연탄이 꽉 붙어버리듯, 사람도 너무 활활 타오르면, 그 무엇과 찰싹 붙어서 일어나는 부작용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활활 타오르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사람답게 가 바로 살아 있을 때 뭔가로 활활 타오르는 경험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적당하게 타오르는 것이 사람답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적당한 불꽃으로 타오르면 사람답게 사는 것일 테다.
서두에 한 질문 '나는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이다. 나는 아직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 뜨겁게 활활 타오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뭔가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사람답다고 할 때는 나는 사람답게 살고 있다.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후회도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 활활 타오르는 경험을 하기 위해 나아가니까.
연탄아궁이의 바람구멍을 꽉 막아 놓으면 연탄이 타다 꺼져 버린다. 아궁이 속 연탄이 활활 타려면 공기가 들어가도록 바람구멍을 열어놓아야 한다. 내가 아직도 활활 타는 경험을 하지 못한 것은 내 속 어딘가가 막혀 있어서 일 것이다. 나는 활활 타오르려고 애쓰기보다 먼저 막힌 곳을 찾아내 구멍을 열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 막힌 곳을 찾는데 평생이 걸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한 번은 활활 타오르고 싶었던 사람이 평생 막힌 곳을 찾다가 생이 끝났을 때, 사람답게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