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초선 숙련가

by 할수 최정희


파초선 숙련가


우리는 파초선을 가지고 있어.


우리 앞엔 불타는 화엄산이 버티고 있어.

우리 모두에겐 화염산 너머에 기다리는 얼굴이 있어, 지켜내야 할 풍경이 있어.

저마다 다른!


화엄산은 겹겹의 크고 작은 산들이 모여 된 구불텅구불텅 기어가는 백두대간 산맥이야.

집 앞의 동산을 넘어가다 보면 이 동산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산이 이어져 있어.

이 산을 거의 다 올라왔는데, 앞에도 좌우 옆에도 또 다른 높은 산들이 이어져 있어.


정작 올라가야 할 산은 뿌연 안개에 가려져 저 멀리 있고 꼭대기만 희미하게 보여,

뒤돌아가고만 싶어져.


가장 높은 화염산까지 가려면 몇 개의 강을 건너야 할지 몇 개의 높은 산을 더 올라야 할지 모르겠고

어쩌면 뼛속까지 스미는 소금기 섞인 차가운 바람을,

나를 집어삼킬 듯 출렁이는 검푸른 파도를 헤쳐가야 할지도 모르는 그 길 앞에서, 뒤를 돌아봐.


돌아가는 길도 여러 개의 높은 산과 개울과 거센 강물을 건너가야 하고

사막을 건널 때의 그 목마름의 기억이 조금 전의 일처럼 생생해 우리는 머뭇거리지.


분명, 뒤돌아가는 길이 더 쉬운 길이지만, 넌 앞에 있는 그 높은 산을 넘었어

하루에도 여러 번 너는 크고 작은 화염산을 넘었어

우리가 화염산을 넘을 수 있는 건 우리에게 파초선이 있어서야


파초선은 선풍기처럼 스위치 하나로 바람을 일으킬 수 없어

천 마디의 말로도 바람을 내주지 않아.


파초선은 거인의 끌처럼 산의 허리를 깎아 계단을 만들어 주지 않아.

포클레인처럼 불타는 흙을 파내 길을 열어주지도 않아.

다이너마이트처럼 단단한 바위를 부수어 산의 높이를 낮춰주지도 않아.

불도저처럼 나무를 쓰러뜨려 평평한 길을 내주지도 않아


네가 산을 넘어갈 때마다

네가 내디딘 그 단단한 발자국에서, 너의 거친 숨결 속에서 바람이 일어나


이 바람은 흘러가지 않아. 마른 흙이 물을 빨아들이듯, 네 안의 파초선 속으로 온전히

스며들어 거기에 머물러. 고요히 때론 강하고 거세게 소용돌이치면서


네가 넘어야 할 그곳을 향해 가기를 머뭇거릴 때

이 바람이 가장 높은 화염산을 향해 가도록 네 등을 떠밀 거야


너는 그 산 앞에 가게 되고 말 거고 너는 그 산을 넘을 수밖에 없어.


파초선이 네 안에 있어!

너, 파초선 숙련가의 길을 걸어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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