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병과 사람과 지구

대구서부도서관 글쓰기 동아리에서

by 할수 최정희


소재: 물병

제목: 페트병과 사람과 지구


숲길에 페트병 하나가 비스듬히 앉아 졸고 있다. 배는 고장 난 아코디언처럼 접혀 있고,

주름 사이사이엔 깊게 파인 곳도, 찢긴 자국도 보인다. 마치 큰 사고를 당한 자동차처럼.이대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을 터, 당연히 분리수거함으로 직행하는 게 순리지.


플라스틱 물병을 잡은 손이 데일 듯 뜨겁다. 배가 이리 아파 어쩌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지만, 나는 뚜껑을 열고 햇빛에 데워진 물을 쏟아낸다. 발끝으로 꾹 눌러 쭈그러트린 뒤 뚜껑을 다시 돌려 닫는다.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무겁다. 그제야 떠오르는 의문들. 펄펄 끓는 페트병의 고통을 외면한 채, 그저 발로 꾹 밟아 분리수거함에 던져버린 이 행위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생수병의 입을 틀어막는다고 지구가 더 뜨거워지는 걸 막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지구에게 인간은 어떤 쓸모가 있는 존재였을까?


이 물병처럼, 언젠가 인간 또한 지구에게 더는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면, 이미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면, 자연이 페트병처럼 — 우리 입을 틀어 막고 휙, 우주 공간 밖으로 던져버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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