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제2장 첫 기억: 찬가가 울려 퍼진 날- 남동생 백일사진
제2장 첫 기억: 찬가가 울려 퍼진 날- 남동생 백일사진
내가 세 살 하고도 석 달이 되던, 하늘은 맑고 햇빛은 창창한 날이었다. 아침부터 동네 사람들이 왁자지껄 우리 집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곧이어 친척들이 찾아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이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모두가 그 사람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는 오늘의 제의를 진행하는 제주, 사진사였다. 사진사는 제사상답게 능숙하게 마당에 삼각대를 세우고 지금 이 순간 가장 소중한 제구, 카메라를 삼각대에 연결했다.
곧 남동생의 백일사진을 찍는 성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은 카메라 주위에 모여들어 카메라를 바라보며 참배하기 시작했다. 사진사는 카메라를 참배하면 안 된다고 사람들을 물리치면서 앞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일제히 앞쪽 툇마루로 시선을 돌렸다.
제사장, 사진사가 활짝 웃으며 아버지에게 “오늘 날씨가 좋아 사진이 잘 나오겠다.”라고 말했다. 사람들도 덩달아 웃었다. 제사장이 지시했다. 아버지에게 남동생을 쪽마루에 앉히라고. 아버지는 남동생의 기저귀를 벗기고 툇마루에 앉혔다.
이제 백일사진을 찍나 보다 기대를 하고 발가벗은 아기를 향한 마당의 참배자들이 얼굴에 활짝 미소를 머금었다, 아버지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남동생은 균형을 잃고 기우뚱 쓰러졌다. 참배자들 사이에서 "아이코!", "에고!" 하는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나는 툇마루 아래, 사람들 다리 사이로 떠밀리며 바라보았다. 남동생은 제단 위에서 기우뚱 넘어졌고, 사람들은 잠시도 앉아 있지 못하는 남동생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웅성거렸다. 성대한 탄생 축하 의식에서 어른들의 길고 단단한 다리에 밀리면서 나는 비참한 존재로 추락하고 있는 나를 다시 한번 발견했다.
나는 그제야 백일사진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게는 그런 사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할머니와 엄마와 아버지는 그 사실에 조금도 마음이 쓰이지 않는 듯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 깨달았던 것이다. 사랑에도 조건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진 한 장이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라 집안에서 나의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는 증표라면, 나는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제단 아래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벽에 기대서 잠깐도 앉아있지 못하는 남동생의 사진을 찍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보면서, 할머니와 아버지와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가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면, 이 세상의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세 살배기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질문이었다. 나는 아마도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모든 관계의 이면을 의심하고, 그것의 진실성을 알아내기 위해 세상과 분리되어 끊임없이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
아버지가 다시 남동생을 제단 위 벽에 기대 앉히자, 참배자들의 찬탄이 쏟아졌다. “저 고추 좀 봐라!”, “자~알 생겼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남동생이 아니라, 여성에게는 없는, 그가 가진 남성성의 상징에 대한 찬가였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그 순간, 남성성의 상징을 향한 집단적 찬가 속에서, 나는 존재 자체가 평가받지 못하는 구조를 직감했다.
내가 그 찬가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우리 집 마당은 내 시야에서 아득히 멀어졌다. 모든 장면이 흐릿해지면서, 나는 마치 다른 시공간에서 이 남성성을 찬미하는 의식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마당에 가족들과 참배자들과 함께 있었지만, 나는 아무와도 함께 있지 않은 존재였다.
나는 ‘내 사진도 찍어줘’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할머니와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한다는 것을 말하거나 드러낼 수도 없었다. 아무도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었으므로. 누군가가 내게 관심을 가지고 “너도 사진 찍고 싶어?”라는 말을 했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을 것이다.
남동생이 자꾸만 옆으로 기울어져서 사진 찍기를 여러 번 실패한 후에, 누군가 외쳤다. "안 되겠다. 정희에게 안겨서 찍어야겠다." 마침내 내가 제단 위로 불려 올라갔다. 주인공으로서가 아니라. 신성한 왕이 쓰러지지 않도록 고정하는 받침대가 되어 남동생을 안고 카메라 앞에 앉았다.
남동생을 안고 카메라 앞에 앉았을 때, 발밑 마룻바닥의 차가움이 발끝까지 스며왔고, 몸이 저절로 움찔했다. 남동생의 따스한 체온은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임을 증명하는 차가운 낙인처럼 느껴졌다. 나는 굴욕과 수치심 속에서 인식했다. 나는 그것이 없는 여자라는 것과 그래서 남동생과는 지위가 다르다는 것을.
사람들은 나와 남동생을 보며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그들 중에 여성들도 있었다. 사진사가 하나, 둘, 셋 외칠 때 사람들은 숨을 멈추고 지켜보았다. 마침내 사진사가 의식을 끝났음을 공표했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 환호성은 참배의식의 끝을 알리는 나팔소리였다
.
제사장 사진사는 삼각대와 카메라를 거두어들였다. 참배자들은 제사장의 손길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폈다. 제사장이 제구를 들고 돌아가자 참배객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집 마당은 텅 비었고 고요해졌다. 나는 고요해지지 않았고 아침의 나와 다른 내가 되었다. 아침의 나는 이 세계의 일부였지만, 저녁의 나는 이 세계를 관찰하는 자가 되었다. 그 의식은 끝났지만, 내 귀에는 아직도 그날의 찬가가 들려온다. 살아있는 동안 나를 따라다닐 그 소리 “저 고추 좀 봐라.” 이제는 그만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