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같은 듯 다른 나와 제인 에어의 삶 제1장 두 개의 붉은 방,
제인 에어』를 읽었을 때, 나는 붉은 방에 갇힌 그녀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 둘 다 어린 시절 세상으로부터 부당하게 내쳐진, 상처 입은 영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내 삶의 지도를 그려가면서, 나는 깨닫게 되었다. 제인과 내가 갇혔던 방의 종류는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것을.
1. 슬픔의 기원: 상속된 유산과 직접 새겨진 낙인
나와 제인 우리 둘의 내면을 지배하는 원초적인 상처는 그 형태와 기원에서부터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제인의 트라우마는 명백했다. 리드 부인이라는 가해자, ‘붉은 방’이라는 물리적 공간, 그리고 “너는 나쁜 아이야”라는 언어적 낙인. 그녀의 상처는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학대의 결과였다. 그렇기에 그녀의 싸움은 처음부터 명확한 외부의 적을 향해 있었고, 자신의 존엄성을 짓밟는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나의 ‘붉은 방’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집안 전체를 지배하던 ‘처리되지 않은 슬픔의 물결’ 그 자체였다. 나는 가해자도, 직접적인 사건도 없는 상태에서, 마치 마른 천이 젖은 천의 물을 흡수하듯 가족의 처리되지 않은 슬픔을 피하지 못하고 흡수하여 버렸다.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도 눈물을 쏟았던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은, 그 슬픔이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라 외부서 흘러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슬픔은 한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말하자면 ‘세대 간 트라우마’였다. 나의 투쟁은 외부의 적이 아닌, 내 몸에 스며들어 이젠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슬픔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에서 시작되어야만 했다.
나는 **‘세대를 흘러온 슬픔의 상속자’**였고, 제인은 **‘직접적 학대의 생존자’**였다." 나는 "내 안에 강물이 고여서 넘쳐흐르는" 내면의 홍수와 싸워야 했고, 제인은 자신을 가두려는 외부의 둑과 싸워야 했다.
2. 사회적 배경: 사 적화된 비극과 공적인 억압
우리가 겪은 고통은 당대의 사회 구조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지만, 그 양상은 달랐다. 제인의 고통은 19세기 영국 사회의 견고한 계급 구조와 젠더적 억압의 산물이었다. 가난한 고아 여성이자 가정교사로서, 그녀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무력한 존재였다. 그녀의 투쟁은 사회가 부여한 여성성과 계급의 한계를 벗어나, 한 명의 독립된 인간으로서 인정받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 우리 가족의 비극은 한국전쟁이라는 국가적 트라우마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는 ‘쥐꼬리’만 한 보상금으로 한 사람의 가치를 하찮게 만들었고, 사회는 월남전은 기억하면서도 한국전쟁은 외면하는 **‘선택적 기억’**을 보여주었다.
우리 가족의 슬픔은 국가와 사회로부터 방치된 채, 온전히 한 집안이 감당해야 할 **‘사적 비극’**이 되었다." 아버지가 수십 년간 홀로 현충원을 찾았던 것은, 바로 이 사회적 망각에 저항하고 가족을 지키려는 고독한 투쟁이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국가로부터 애도의 권리를 박탈당한’ 존재였고, 제인은 ‘사회로부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박탈당한’ 존재였다. 나의 이야기가 국가적 비극이 어떻게 한 가족의 내면을 수십 년간 세대를 넘어가며 지배하는지를 보여주는 미시사(Micro-history)라면, 제인의 이야기는 억압적 사회 구조가 한 개인의 영혼을 어떻게 옭아매는지를 보여주는 계급투쟁의 기록이다.
3. 투쟁의 목적: 애도를 위한 건가, 자아를 지키기 위한 건가
나와 제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해방의 의미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제인의 여정은 자신의 존엄과 가치를 스스로 확립해 나가는 자아 확립의 투쟁이다. 그녀는 "나는 새가 아니고, 어떤 그물도 나를 잡을 수 없다"라고 선언하며,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도 자신의 독립적인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해방은 과거의 상처와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여정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이전에, **"나의 이 슬픔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슬픔의 근원을 탐구여야만 했다. 이태원 참사를 통해 비로소 나의 슬픔과 가족의 역사를 연결 짓는 순간, 나의 탐구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 글쓰기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온전히 끝마치지 못한 **‘애도의 과업’**을 내가 이어받아 완성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그 슬픔이 다시 내 자녀들에게 전해졌음을 깨닫는 순간, 나는 트라우마가 완전히 끊어낼 수 없는 비극의 대물림 현상임을 자각했다. 그리고 개인의 해방이 얼마나 힘든 과제인지를 절감했다.
이 탐구는 바로 내 삶의 붉은 제단을 허물기 위한 시도이다. 나에게 해방이란 **‘과거와 연결되어 슬픔의 근원을 이해하고 그것을 애도하는 것’**이라면, 제인에게 해방이란 **‘과거로부터 단절되어 스스로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내 이야기는 역사의 무게와 그 비극적 순환을 이야기하고, 제인의 이야기는 개인의 의지와 성장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제인 에어의 서사에는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 즉 세대를 이어 흐르는 슬픔의 강물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야말로, '재단 아래 소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나는 내 앞에 놓여 있던 붉고도 높은 제단을 허물기 위해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