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셋 아빠의 고군분투 직장 생존기
‘팀장님! 이거 주문이 심상치 않습니다! MD에게 전화해서 주문 끊어야 될 것 같아요! 재고 모자랄 것 같습니다!’
2018년 우리 회사 제품으로 하는 마지막 홈쇼핑 방송의 현장이다. 연말이라 주문이 많지 않을 것으로 봤는데 예상을 훨씬 웃도는 주문량으로 방송 종료 10분 전에 매진을 찍었다. 방송 호조 덕에 회사에 보고한 연마감은 다행히 마무리하게 되었다. 갑작스레 몇 백개를 더 출고해야 하는 물류센터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자고로 매출은 다다익선이다.
MD와 쇼호스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집을 향한다. 오전 방송이라 새벽 5시에 일어났더니 살짝 피곤하다. 운전 중 졸지 않으려고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찬 기운이 확 잠을 깨운다. 낯선 차가운 공기 탓인지 오랜만에 옛 기억이 떠오른다.
해뜨기 전 어둑한 아침, 졸음을 깨우던 출근길의 그 차가운 공기. 내 첫 회사에서의 일상은 늘 이 어둡고 차가운 공기와 함께 시작했다.
스물여덟, 학사장교를 제대한 나는 국내 생활용품 회사의 유통영업본부팀에 입사했다. 인턴 중 50%만 채용하는 악조건을 어렵사리 통과해 정규직이 되었을 때는 수능 합격만큼 기뻤다. 회사의 핵심인재가 되어 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포부와 함께 말이다. 면접 때 잘 보이려고 직접 만든 모조품 배찌 대신 회사가 준 진짜 배찌를 자랑스럽게 달며 출근했다. 회사 동기들은 가족처럼 끈끈했고 입사 교육은 인생에서 손에 꼽히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 때는 상상도 못 했다. 내가 이 회사를 제 발로 나오게 될 줄은...
퇴사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영업이 적성에 안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두 번째는 너무 센 근무강도와 회사생활에 지쳐서였다. 당시에는 두 번째 이유를 자각하지 못했다. 그냥 생존본능처럼 다른 회사를 찾았고 합격해서 떠났다. 첫 회사는 오전 7시 반이 출근시간이었다. 사실 정식 출근시간은 8시였다.(이것도 빠르다) 다른 부서는 8시에 출근할 때 영업부서만 7시 반에 출근을 했다. 늦지 않으려면 6 시대에 일어나야 했고 신입사원 때는 7시까지 출근했다. 회사에서 인정받는 잘 나가는 차장님은 늘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 출근을 하셨다. 신입 1년 동안은 그렇게 7시에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연차란 써볼 기회가 없는 허상에 불과했고 그 사이 몇몇 동기들은 떨어져 나갔다.
술 문화도 최악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은 꼭 회식을 했고 그중 한 번은 2~3차까지 꼭 진행되었다. 임원급 부장님이 팀장으로 계셔서인지 차장, 과장님들도 이 분이 술 먹자고 하면 말리지를 못했다. 팀장님은 술을 좋아했지만 술에 약했고 한 때 술만 먹으면 부서원들에게 ‘머리 박아’를 시키는 분이었다. 내가 있을 때에도 걸핏하면 폭언에 과도한 술버릇으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곤 했다. 어느 날은 2차 호프집에서 맥주잔을 일렬로 붙여놓고 그 사이사이에 소주잔을 올려놓더니 내게 방울토마토 세 개를 쥐어주며 세 발자국 뒤에 서라고 했다. 속으로 ‘또 뭘 시키려고 이러나’ 했는데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으라고 했다. 그러고는 입으로 ‘후!’ 불어서 앞에 있는 소주잔을 맞춰 도미노처럼 소주잔이 맥주잔 사이로 떨어지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난 장교 출신이다. 군 생활 3년 동안 그 어느 대령, 중령도 이런 걸 시킨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분위기는 군대 훈련소보다도 험악했고 실패하면 싸늘한 분위기가 더 심해질 터였다. 어떻게 되었을까? 말도 안 되지만 난 한 번에 성공했다. 인간의 집중력은 놀랍다. 살기 위해 난 본능적으로 목의 각도, 입김의 힘 등을 약 1.5m 앞에 있는 저 작은 소주잔에 맞추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였다. 이 성공으로 난 회사에서 받았던 그 어떤 칭찬보다도 이때 제일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았다.
이 유사한 생활을 만 3년간 했다. 하루 종일 앉아 전화 100통을 받고 정신없이 일을 하다 4시쯤 바람을 쐬러 회사 옥상에 올라가면 기진맥진한 채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며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하곤 했다. 지난날이 후회도 됐다. 이렇게 내가 오래 앉아 일할 수 있는 사람이면 이 정신에 고시공부를 할걸 그랬나 싶었다. 그래서 진짜 로스쿨 공부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난 영업이 싫었다. 갑질 하는 유통사에 비굴하게 구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고 회사 내에서 영업이 받는 취급도 마음에 안 들었다. 무엇보다 회사생활을 하면 할수록 청년 때 꿈꾸던 사회정의와 관련된 일과는 너무 멀어져만 가는 게 힘들었다. 사실 이 고민은 작년까지도 지속됐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사회적 기업 도전에 실패한 후 지금은 완전히 마음을 접은 상태이다. 로스쿨, 협동조합 취업 도전, 선거캠프 참여, 시민기자 도전, 이민 고민 등 참 내면의 갈등을 해결해보고자 많은 도전과 고민을 이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Demand Plan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해당팀 부서장인 부사장님이 직접 영업팀 전무님에게 요청했다. 나도 가고 싶다고 응했고 거의 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결국 가지 못했다. 전무님이 영업에서 키울 인재라는 이유로 끝내 부사장님의 요청을 거절하셨다. 사실 당시에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못 가게 되었다는 팀장님의 말만 전해 들었지 전무님이 나름 좋은 의도로 거절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었다. 이 사실도 퇴사할 때 인사팀 부장님이 이야기해주어 알게 되었던 내용이다. 회사의 커뮤니케이션 부재가 이 때도 여실히 드러나 안타까울 뿐이다.
아무튼 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내가 가고자 하는 부서이동이 막혀버린 황당한 상황에 맞닥뜨렸다. 그리고 화가 났다. 홧김에 취업사이트를 검색했고 3~5년 차를 뽑는 외국계 가전회사가 눈에 들어왔다. 난 망설이지 않고 지원했고 몇 번의 면접을 통해 최종 합격하게 되었다. 회사에 이 사실을 알리는 내 마음은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미안한 마음 두 가지였다. 회사에서는 퇴사를 만류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합격한 외국계 회사에서의 행복한 미래에 가 있었다. 난 결국 퇴사했다. 퇴사하는 날 전 층을 돌며 한 명 한 명에게 모두 인사했다. 내 인생의 첫 회사, 한 순간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고3 이래 최고로 성실한 3년을 살았다.
솔직히 지금은 퇴사를 후회하기도 한다. 힘들었지만 인정받고 사랑받기도 했기에 좋은 기억도 많기 때문이다. 퇴사 이후 더 잘된 회사를 볼 때면 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
이직한 외국계 회사에서는 한 마디로 실패했다. 이직한 곳도 영업부서였지만 일의 종류와 깊이가 달랐다. 대기업에서 한 부분에서만 전문적으로 일했던 나는 외국계 회사가 요구하는 광범위한 업무처리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대신 개인에게 부여되는 권한과 책임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권한보다는 책임이라는 무게에 짓눌렸고 자신감을 잃었다. 첫 회사처럼 책임져주는 선임은 없고 오직 스스로가 감당해야 하는 무게감 때문에 점점 불면증까지 오기 시작했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 결국 1년 4개월 만에 퇴사를 했다. 자신감을 잃었고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나 싶었다. 퇴사를 결심하고 다시 취업사이트를 검색하던 시점에 지금의 회사가 눈에 들어왔다. 외국계였고 브랜드도 괜찮았다. 몇 번의 면접을 통해 최종 합격을 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그동안 몇 번 문을 두드린 협동조합에서도 같이 일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왔었다. 살짝 고민스러웠다. 이 협동조합에 가면 왠지 내가 꿈꿔온 사회정의와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끝내 지금의 사기업에 왔다. 솔직히 연봉차가 너무 컸고, 한편 사회에서 무너진 자신감을 다시 회사생활을 통해 세워보고 싶기도 했다.
세 번째 회사에서는 홈쇼핑 업무를 담당했다. 이 회사도 만만치는 않았다. 입사 첫날 팀 동료 여직원은 나를 따로 부르더니 ‘난 당신 입사를 반대했었다.’며 대놓고 시비를 걸었다.(난 그 이후로 이 여직원을 속으로 ‘미실’이라고 부른다) 알고 보니 팀장이 회사 대부분의 여직원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이었고 난 그 사람이 뽑은 부하직원이라 입사 때부터 미운털이 박힌 것이었다. 폐쇄적인 회사 분위기, 텃새 등은 이전 회사들에서는 경험해보지 않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그러나 장점도 있었다. 나에 대한 팀장님의 신뢰가 두터워지면서 자연스레 내 입지가 좋아졌고 일을 많이 한덕에 그만큼 빨리 업무를 익혔다. 3년 차가 되어가는 지금은 나름 평판도 좋아져 텃세 부리던 여직원들과도 큰 마찰 없이 잘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취업사이트에 올려놓은 내 이력서를 내리지 않았다. 한 달에 한번 꼴로 연락 오는 스카우터들을 통해 지금의 내 위치(?)를 점검하고 경력채용 동향을 놓치지 않았다. 사실 그 사이 몇 번 다른 회사에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때로는 봄바람처럼 이직을 고민할 때 연봉이나 조건보다 삶의 의미를 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회사를 찾고자 했었다. 회사에서 단순히 돈만 버는 것을 넘어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세상과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내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이 아득하고 진저리 날 때마다 소명과 직업이 일치하는 인생을 꿈꾸고는 했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을 내려놓았다. 직장과 소명이 일치해야 한다는 집착(?)을 버렸다. 마지막이라 생각한 사회적 기업 도전이 좌절되고 둘째를 낳으며 자연스레 지금의 현실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내게는 그 어떤 소명도 없는 것만 같았고 그런 고민조차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런데 당시 이 글을 쓰던 중 ‘일상생활사역연구소’에 내 친구가 쓴 인터뷰 글에 눈이 갔다. “매일 하시는 일을 소명이라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베이킹 온라인 쇼핑몰 사업을 하는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신이 저를 이 일을 하도록 부르셨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이 일을 통해 살게 하신다는 생각은 하게 됩니다. 이 일이 신께서 제게 날마다 보내시는 만나와 메추라기이고, 또 광야이기도 하고,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소망과 소명 없이 직장을 다니는 나에게 가슴 한 켠을 어루만지는 듯한 말이었다. ‘이 일을 하도록’에 집착한 나로서는 ‘이 일을 통해 살게 하신다는’ 말이 지금 내 상황과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지금의 직장을 통해 내가 살아가고 있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기에 하루하루의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감사함을 잊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는 이때의 생각이 도움이 되었는지 내가 하는 일에 나름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고 업무에 매진하고 있다. 쫓기듯 하던 이전 두 번의 이직과 달리 이번에는 내 업무와 연계해 홈쇼핑 시장에서 급성장 하기 시작한 카테고리에 새로운 사업기회가 있는 회사의 비전을 보고 선택해서 왔다. 그 덕인지 훨씬 쉽게 적응했고 주위의 인정도 더 빨리 왔다. 물론 힘든 점이 없지는 않다. 지금껏 다닌 회사에서의 모든 경험이 이 회사에서 업무를 하기 위해 거쳐온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회사는 업무강도가 강하고 범위도 넓다. 게다가 아이 셋의 육아는 내 여가시간과 다른 외부 활동할 여유를 앗아갔다. 오직 일과 육아가 최근 1년여의 내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만족한다. 그동안 내게 전문성이 있을까 늘 의구심이 있었으나 이제는 내 전문성이라 부를 수 있는 업무가 생겼고 그것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일터가 있다는 점,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다는 부분이 감사하다. 이제는 이 일과 연계해 이후 50대에는 어떤 일을 또는 사업을 할 수 있을지를 점차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소명과 직장, 삶에 대한 내 고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의 가나안 땅인 지금의 내 삶을 소중히 여기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