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풍화 혹은,
눈길에 발자국을 새기며 세운상가로 향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상가 내의 몇몇 매장들은 어두컴컴하게 불이 꺼져있었고 때문에 전체적으로 건물 복도가 어두웠다. 추운 날씨 탓에 난방을 위해 매장 문은 모두 닫혀있었고 소심했던 나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크고 작은 음향기기가 잔뜩 쌓여있는 매장들이 복도 좌우로 계속해서 보였지만, 이 어둡고 적막한 건물의 분위기 탓에 내가 매장에 들어가 건네게 될 첫마디가, 그 한마디가 매우 신중해져서 고민을 하다 보니 복도 끝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복도를 두 번 정도 왕복했고 이번엔 일단 들어가 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던 찰나, 복도에서 가장 환하게 보이던 매장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나오셨다. ‘뭐 찾는 거 있어요?’,조용하던 복도에 할아버지와 나의 대화만이 오갔고 추천을 해주신다며 나를 가게로 데리고 가셨다.
매장 내부는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 넓었고 주먹만 한 스피커부터 나보다 큰 스피커까지 주인 할아버지의 자랑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LP 음악을 듣고 싶다고 하니 어딘가로 나가셔서 오른쪽으로 몇 칸 떨어져 있던 음반매장의 할아버지까지 모셔오셨다. 나는 매장 한 구석에서 할아버지 두 분께 둘러싸여, 오랜만에 찾아온 신입에 호기심을 갖는 이 분야 전문가들의 눈빛을 꽤나 오랜 시간 받으며 서있었다. 이런저런 자기소개와 도란도란 대화 끝에, 세운상가까지 걸어오며 찾아본 턴테이블과 스피커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고, 음반가게 할아버지로부터는 꽤나 괜찮은 상태의, 적당한 사용 흔적이 있는 'The best of earth wind & fire’ 바이닐 한 장을 구할 수 있었다. 이후에 2년 간 그 매장에서 무료로 수리를 받기도 했고 종종 잃어버린 부품도 공짜로 얻은 것을 생각하면, 바이닐 수집을 질기게 해올 수 있었던 것은 세운상가에서 이것을 시작한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매달 10일, 월급날에 150 남짓의 돈을 받으면, 미리 생각해 두었던 바이닐들의 가격을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곤 했는데, 나는 특히, 아무도 포장을 뜯은 적이 없는 새 음반보다는 남들의 손길이 조금 거친, 중고 바이닐들을 좋아했었다. 물론, 찍어낸지 얼마 안 된 새 제품을 사면 좋은 음질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겠지만, 그것만을 생각한다면 최신 헤드셋과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듣지, 굳이 턴테이블을 사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바이닐 음악에 홀리게 된 것은 그 풍부한 소리가 아닌 오래된 LP의 스크래치들이 바늘에 긁히며 나는… 비가 오는 것 같기도 하고, 영화를 뒤로 되감는 소리와도 같은 ‘지직…지지직…’ 소리 때문이었고, 요즘 나오는 새 상품들에게선 그런 잡음을 맛볼 수가 없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바이닐의 감가 요인이 될 이 상처들은, 나에게만은, 매끈하게 반짝이는 표면보다 가치가 있었다.
바이닐의 상처들을 보면 혼자 망상 같은 상상을 하곤 했다. 분명, 전에 그것을 새 상품으로 구매했던 사람도, 매대에서 집어 들었을 때는 설레는 마음과 함께 아껴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겠지… 그렇지만… 턴테이블에서 빼내어 케이스로 넣는 과정에서 불행하게 바닥에 떨어뜨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너무나도 바쁜 현실을 살아내다 보니 판매대에서 다시 판매대로 돌아가기까지 자주 꺼내어보지 못하고 방치했을 수도 있겠지 … 아니, 혹시 어쩌면, 바이닐에 금방 흥미를 잃어 라면 받침으로 썼을 수도 있겠구나…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중고 매장에 내놓아져 있는 이 바이닐들이 처량해 보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내 품 안에 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속, 나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상상해 보는 것은 퍽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