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길에서 – 설날의 거리두기

가족과의 마음의 거리

by EunJoo Shin

설날 연휴가 시작되었다. 명절에 대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아마도 가족일 것이다.

만나지 못했던 가족과 친지들을 오랜만에 만나게 되면서 서로의 정보가 노출되면서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는 날이기도 하다. 타고 온 자동차, 차림새(의복과 액세서리), 가지고 온 선물, 자기 자신의 직업, 자녀의 성취, 생활방식이 소리 없이 의미를 전달한다. 의식하지 않은 비교와 평가가 오가는 만남의 공간에 들어선 것이다. 다정한 만남처럼 보이지만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를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친지와의 대화 속에 따뜻함과 동시에 긴장이 흐르는 이유다.


명절의 가족 모임은 반강제적이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부모를 정하지 않았고, 형제자매를 고르지도 않았다. 혼인이라는 선택으로 이루어진 관계라고 할지라도 그 관계 속에서 자녀라는 운명이 발생하면서 관계가 고착되기도 한다. 가족 관계는 그렇게 이미 주어졌다. 심한 불화로 인하여 가족 간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해도 가족이라는 심적 연결성은 쉽게 끊어버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늘 상기되는 것이 가족이다. 그래서 가족은 바꾸거나 버릴 수 없는 공통의 유전인자를 가진 운명인 것이다.

세상에는 개인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는 다양한 관계가 있다. 이런 관계가 자기 자신과 조화롭게 융화될 수 있다면 그 관계로 인하여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게 된다. 삶에 있어서 좋은 관계는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 인간에게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끊을 수 없는 관계, 운명처럼 주어진 관계에서 함께 할 수 없을 만큼의 다름과 차이가 발견된다며 관계 유지는 어려워진다. 관계 유지가 삶의 무게를 가중시키고 결국 삶이 불행해진다. 타자의 결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상호 간의 차이와 다름에 기인한 불행이다.

차이를 없애려는 시도는 결국 ‘나’ 아닌 ‘타자’를, 비록 그것이 가족이라 할지라도, ‘나’와 동일하게 만들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설날 하나의 식탁에서 같은 음식을 나누어 먹지만 똑같은 맛을 느끼지는 않는다. 같은 조상을 기억하지만 그 내용은 다르다. 다름과 차이가 타자를 규정하는 요인인 것이다. 타자는 ‘나’와 같을 수 없기에 타자의 자유로운 사유와 태도를 용인하거나 묵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용인과 묵인이 바로 ‘마음의 거리두기’다. 나 자신과 같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 나의 생각과 의견에 대한 반대를 타자의 자율성으로 인정하는 마음이다. 은근하면서도 노골적인 자랑과 허세 앞에서 초연해질 수 있는 것은 “‘나’와는 상관없다!”라고 생각하는 것, 귀에 들어오는 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마음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마음의 거리두기’다.


‘나’와는 다른 것, 차이 나는 것을 마음으로 끌어들이는 순간 불만이라는 악마가 고개를 든다. 불만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누구 때문에, 또는 무엇 때문에”라는 원망의 대상을 찾아서 이간질을 시작한다. 만나기만 하면 별것도 아닌 것을 자랑하고 과시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람이 있다. 본인에게는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별거 아니라는 것을, 의미 없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유치한 행동이다. 듣고 보는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고 늘어놓는 자기 자랑과 허세를 우리는 자주 경험한다. 이런 경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먼 나라 이야기처럼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듣고 보는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이 ‘마음의 거리두기’다.

정치철학자 하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인간의 조건을 ‘복수성’이라 설명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다. 가족은 이 복수성이 가장 밀집된 공간이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어도 삶의 해석은 다르다. 가치관도, 정치적 판단도, 생활의 방식도 다르다. 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아무리 큰 효도를 했어도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그저 다름이고 차이일 뿐인 ‘복수성’이다. 여기서 ‘복수성’은 개성이다. 이 개성이 바로 공적 조건이며, ‘복수성’은 서로 다른 개인들이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거나 그냥 흘러 떠내려가도록 내버려 두는 ‘물적 심적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나’와는 다름과 차이를 가지고 있는 타자의 사유와 행동이 ‘나’라는 주체의 사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친밀함은 분명 좋은 것이다. 그러나 밀착은 자유를 방해한다. 밀착은 가족 간이라도 개인과 개인의 경계가 무너져 서로의 자율성을 상실하게 만들고 참견을 넘어서 지시하고 구속한다. 지나친 관심, 지나친 동류의식, 지나친 감정이입을 경계하기 위한 ‘물적 심적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이‘거리두기’는 상호 자유와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에 따르면 타자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책임을 요구하는 존재다. 특히 가족은 그러하다. 자랑과 과시를 하면서 “나를 외면하지 말라.”는 간절한 요청을 수용할 수 있는 거리, 봐주고 들어주는 마음에 여유를 갖는 것이다. 가족은 우리가 가장 먼저 경험하는 타자다. 가장 익숙하지만 끝내 동일해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가족이다. 가족 안에서 책임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부모 부양의 문제, 형제간의 배려, 돌봄의 분담 등과 같은 책임을 놓고 불화가 생기기도 하지만 끝내 저버리기 어려운 존재다. 그래서 가족은 의존의 대상이며 최후의 보루와 같은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삶의 무게로 작용하다. 책임이 사랑을 압도할 때, 관계는 짐이 된다. 여기서 정말로 필요한 것이 책임이 사랑을 억압하지 않는 ‘거리두기’다.


‘거리두기’는 단절이 아니다. 무관심도 아니다. 관계를 포기하는 태도는 더더욱 아니다. ‘거리두기’는 관계 안에서 자신을 보존하는 사유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타인의 감정과 나의 판단을 구분하는 능력, 모든 기대에 즉각 반응하지 않는 태도, 차이를 교정하려 들기보다, 차이를 인정한 채 머물 수 있는 힘을 축적하는 것이다. 설날을 앞두고 가족 관계를 일처럼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갈등을 해결하고 친화관계를 유지 회복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책임을 완벽히 수행해야 한다는 압박을 내려놓아야 한다.


윤리는 희생의 총량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윤리는 차이를 안은 채 책임의 범위를 성찰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설날은 어쩌면 시험의 시간이 된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 감정에 반응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유하고 있는가.” “‘나’는 상대를 설득하려 하는가, 아니면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있는가.” '거리두기'는 냉정함이 아니라 성숙함이다. 관계를 끊지 않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철학이다.


가족은 운명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운명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는 우리의 사유에 달려 있다. 다름과 차이를 제거하려는 조급함 대신, 차이를 인정하는 침착함, 책임을 짐으로 만드는 밀착 대신, 책임을 선택으로 남겨두는 거리. 설날은 그 거리를 배우는 시간이다. 가까이 있되 부딪히지 않고, 책임을 지되 소진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다. 아마도 이 '거리두기'가 가족이라는 가장 오래된 관계 안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현대적인 윤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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