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길에서 - 의존에서 자율로

독신은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사람

by EunJoo Shin

세상 모든 것은 혼자서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생존은 오직 외부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유지되기 때문이다. 언덕에 외로이 서 있는 느티나무도 항상 누군가와 함께 작용하고 있으며, 드높은 창공을 홀로 나는 독수리도 바람을 타고 먹이를 찾아 눈을 크게 뜬다. 어쩌면 모든 존재는 그 종류가 무엇이든지 간에 타자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다. 즉 철저하게 타자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의존 관계가 긴밀한 필요조건으로 이루어질수록 타자의 영향력은 크게 미친다. 타자의 영향을 크게 받을수록 주체의 자유는 제한을 받는다. 자율이 아니라 타자와의 공존을 위한 공동의 규율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작게는 한두 명, 또는 10명 미만으로 이루어진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국가, 지역, 지구에는 공동의 도덕률을 기반으로 하는 규율 또는 규칙이 있어야 한다. 일시적으로 조직된 무리나, 영구적으로 구성된 집단에서 규칙은 만들어지고 만들어진 규칙은 지켜져야 보다 평화롭고 공평하게 서로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관계가 유지된다. 그러므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고립될 수 없다. 비록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세상과의 관계에서 친화를 이루지 못하고 상처를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한, 생명 유지에 대한 아주 가느다란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 누군가, 또는 그 무엇인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즉 타자의 규칙에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산속에서 혼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 친구, 사회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관계의 시간적, 물리적 거리를 확보하고 있을 뿐이다. “외롭지 않나요?”라고 진행자가 물으면 자연이 가족이고 친구이며, 개나 고양이 등 짐승과 함께 하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깊은 산속이라 해도 여전히 누군가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외롭지 않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이런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혼자 있는 시간에도 여전히 타자를 의식하고 타자와 함께 할 수 있는 재미나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그저 “가정을 이루지 않는 연예인”이 카메라 앵글 앞에서 꾸며진 일상의 한 부분을 볼 수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것이 다큐인지, 관찰인지, 아니면 픽션에 가까운 논픽션인지 알 수도 없고, 연예인들의 광고 방송인지 헷갈리고, 재미, 의미, 흥미가 없어서 몇 번 보고 다시는 보지 않는다. 이 두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것은 ‘혼자 산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산다’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일인 가구, 독신 가구가 늘어나자 생긴 연구 부족의 어설픈 독신 프로그램이다. 독신이라고 해도 여전히 외부의 타자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혼자 산다는 것은 타자와의 직접적이고 긴밀한 친화 관계를 최소화하며 기본적인 생명 유지에 필요한 관계만을 유지하는 사람일 뿐이다. 독신이란 타자와의 관계, 특히 자율성을 위협하는 타자와의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고 언제나 길고 느슨하고 관계만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원하는 삶을 위해 자기 스스로 만든 자기 규칙, 또는 규율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에 방해가 되는 일체 피곤한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규칙을 세우고 지킬 수 있는 것이 자유다. 그 자유를 축소 변경 왜곡 시키는 타자와의 관계를 거부하는 것이 자율이다. 사회적 규율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에서의 자율이다. 사회적 규율과 자율이 충돌할 때는 자율에 우선한다.


대부분의 관계는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 사랑 때문이라고 미화된 결혼이라는 사회 제도 또는 철저히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양성 간의 관계이며, 사랑 때문이라고 미화된 성적 사회적 생물학적 욕망의 결과물인 자녀도 역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 같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인지’,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업인이 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건강한 자녀를 두고 병에 걸리지 않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다.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그게 전부다. 행복하게 잘 사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그래봐야 그게 전부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참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고 갈등하며 소란을 피우고 행복하게 살지도 잘 살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저 이게 행복이겠거니 하면서, 이렇게 살면 되는 것이겠거니 하면서 말이다. 왜냐면 결국은 다 없었던 상태로 돌아갈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저 사회적 통념을 따르며 사는 것이 주류이며 주류가 안전하다고 여기며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과 달리, 어쩌다 행복하게 사는 자기만의 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그런 사람이다. 나 자신이 원하는 행복이 무엇일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의 의미는 또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저 열심히 타자의 삶을 따라서 잘 살다가 죽는 것이다. 수많은 인간이 그러했듯이 어떤 단 한 사람에게도 의미로 남지 못하는 무(無)로 돌아가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것들이 남겨지고, 그 남겨진 별 볼일 없는 업적 또한 누군가에게 깊은 의미 또는 가치가 되지 않는 한, 그저 살다가 죽었다는 족보의 기록으로 남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와 같이 평범 이하로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의미 있는 족적을 날길 수 없는 사람은 어찌해야 할까? 세상과 타자가 어떠하던지 나는 나만의 자유를 위해 독신을 선택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타자의 규율과 나의 규율이 충돌할 때 언제나 나의 규율을 우선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칸트의 “정언명령”을 잊지 않았다. “나의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업적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라는 말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내가 만든 규칙을 따라 사는 ‘나는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어쩌면 타자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타자의 권력과 부에 타협하지 않을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삶의 방식이 독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택하고 버릴 수 있는 기회를 유지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자유, 빈자리를 외로움이 아니라 여유로 즐길 수 있는 자유, 그것이 자유다. 그 여유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의존도 기대도 하지 않는 타자들과 사심 없이 생명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규율이 자율이다.


이런 삶을 나는 독신이라 한다. 1인 가구가 아니라. 독신과 1인 가구는 완전히 다르다. 자율성을 갖지 못한 독신은 혼자 살아도 독신이라 할 수 없다. 그냥 같이 의지하고 살 사람이 없어서 혼자 지낼 뿐이고 독신은 그 누구도 의존하지 않고 자기만의 자율성을 갖추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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