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자루에 메고 곁길 걷기
우리는 늘 ‘더하기’를 하며 살아간다. 나이를 더하고, 소유를 더하고, 관계를 더한다. 이 더하기는 어느새 생존의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규범이 되었고, 삶의 목적처럼 작동한다. 태어날 때 우리는 마치 반드시 채워야 할 빈 자루 하나를 건네받은 것처럼 살아간다. 그 자루를 가득 채우는 일이 곧 자기완성이라고 배워 왔다.
그 빈 자루는 운명처럼, 신의 뜻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지식과 경험, 물질과 관계를 넣고 또 넣는다. 그것이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단지 더 넣고 싶어서다. 나는 이 자루의 이름을 ‘결핍’이라 부른다. 결핍은 실제 부족이 아니라, 부족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사회와 타자의 욕망이며 가상의 감각이다. 결핍의 느낌은 욕망의 결과이자, 사회가 욕망을 조직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부족해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도록 명령받고 길들여졌기 때문에 채운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아귀(餓鬼)처럼, 밑 빠진 독처럼, 결코 채울 수 없는 공허를 채우려 한다. 공허는 가상이지만 자루는 실재다. 이 자루는 놀라운 신축성을 지녀 넣을수록 더 커진다.
이 자루는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고, 좀처럼 찢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의 손길이 닿는 대로 이것저것 집어넣으며 자루를 부풀린다. 자루의 기묘한 성질은 그 속에 담긴 것을 닮아간다는 점이다. 우리는 서로의 자루를 흘끗거리며 비교하고, 그 내용물에 따라 관계를 맺거나 끊기도 한다. 사회는 자루의 크기와 모양으로 결속하고 분열한다. 때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 넣고, 있는 것을 감추며 자루를 키운다. 그렇게 자루는 기형이 되거나, 때로는 유난히 아름다운 형상을 띤다. 그 자루는 자루 주인의 표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처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가능성’이라는 빈 자루였다는 사실이다. 그 자루는 어느새 ‘짐’이 되었다. 자초한 짐이다. 무겁다고, 힘들다고, 바쁘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채우기를 멈추지 않는다. 다른 이의 자루를 본보기 삼아 따라 채우고, 순간의 현혹을 자신의 욕망이라 믿으며 자루의 모양과 크기를 만든다. 결국 자기만의 자루는 사라지고, 사회가 승인한 자루, 타자의 시선에 타자의 욕망에 휘둘리는 무정형의 자루만이 남는다. 주체도 타자도 흐릿해진 채, 거대한 자루들만 세상을 채운다. 겉모양은 차이를 만들었어도 그 속은 모두 자본주의가 생산한 가짜 결핍의 흔적들이다.
뒤늦게 자루를 들여다보려 해도 그것은 쉽지 않다. 이미 그 안에는 ‘나’가 없고, 사회의 욕망, 타자의 욕망이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자루를 거꾸로 들어 내용물을 쏟아내는 일은 큰 용기를 요구한다. 설령 모두 꺼내 놓았다 해도 우리는 말한다. “이건 내 선택이었어. 이게 바로 나야!”라고 마치 자신을 재발견한 것처럼 그 모든 것을 자루에 다시 집어넣는다. 후회로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없앤다는 것, 비어 둔다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제 처음 주어진 ‘가능성’이라는 말은 기억조차 없다. 내용물에 대한 집착은 종종 부재가 불러올 공허와 후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언젠가의 필요’를 핑계 삼아 우리는 평생 사용되지 않을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자루를 비우지 못하고 채우기만 한다.
이 자루 채우기는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더 크고 더 값진 자루는 신화가 되고, 종교가 된다. 작은 자루나 빈 자루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가상의 결핍은 강도처럼 마음에 침입해 자족의 평안을 빼앗기고, 우리는 끝없는 비교 속에서 자신을 소진한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자루는 결국 자아를 태우고 허무라는 재만 남긴다.
연말이 되면 나눔과 베풂이 늘어난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단어들 속에도 위계가 숨어 있다. 자루에서 꺼내는 이 행위조차 또 다른 인정 욕망의 채우기일 수 있다. 나는 문득 ‘남겨 두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한다. 모두 쓸어 담은 뒤 일부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더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남겨 두면 어떨까! 과잉이 불러온 부패와 악취에 대한 ‘만나(man, 이집트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주어 먹었던 신이 내려준 음식)’이야기가 떠오르는 이유다. 필요하지 않아서 남겨진 만나는 녹아 없어지고 없었던 상태,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가고, 새로운 날, 필요의 때에 주어진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다면 ‘더(more)’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다.
나는 어린 시절 몸이 약해서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다니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선생님의 꾸지람이 두려웠지만 필요한 책마저도 무거운 것은 빼놓고 학교에 가곤 했다. 가방은 가벼웠고, 그 덕에 먼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알았다. 지금의 삶을 가볍게 살기 위해서,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때로 필요한 것조차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 경험은 내 인생의 자루를 다루는 방식이 되었다. 나는 지금 더 이상 남의 자루를 흘깃거리지 않고 타자의 욕망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필터링을 하는 장치들을 마련했다.(이 필터링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내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도 않을 수도 있는 가상의 필요를 대비하기 위한 것들로 내 자루가 무거워지지 않도록 나의 힘의 한계를 꼼꼼하게 살피며 살고 있다.
그래서 내 자루는 작고 가볍다. 그래서 큰 자루를 메고 갈 수 없는 샛길, 곁길로 빠질 수 있다. 그 곁길에는 비교도 속도도 경쟁도 욕망의 부추김도 없다. 다만 나의 호흡과 보폭이 있을 뿐이다. 각자의 인생은 저마다의 자루를 걸머지고 가는 여정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가상의 결핍 앞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쩌면 해답은 단순하다. 빼기나 덜어내기 아니라 처음부터 집어넣지 않기, 신중하게 넣지 않고 제외하기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수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는 사유와 타자의 따가운 시선들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작은 자루만이 허용되는 과잉의 소란과 잉여의 부패가 없는 쾌적하고 평화로운 곁길로 접어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