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길에서-경쟁으로부터 자유!

나의 그릇을 알다

by EunJoo Shin

경쟁 없는 다름의 자유를 찾아서

어머니와 똑똑한 언니 손에 이끌려 중학교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딸 넷을 책임지고 계신 어머니는 딸이지만 남의 집 아들보다 훌륭하게 키우겠다는 다짐으로 우리를 교육시켰다. 교육열이 높으셨던 아버지는 공부를 월등히 잘하는 내 바로 위 언니를 서울에서 교육시키기 위해 큰 언니를 보호자로 하여 서울로 전학을 시키셨다. 언니들은 서울에 이모 댁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둘째 언니는 초중고등학교까지 줄곧 전교 1등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힘들다는 서울교육대학교에 합격했고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최고 학벌이었고 최초의 여자 선생님이 된 것이다.

그러나 언니가 이모 댁에서 겪은 일은 쉽게 잊힐 수 없는 부당함과 미움을 받아야 했던 것 같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희생해야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었을 것이다.

같은 행동을 해도 내 자식보다 나은 남의 자식은 더 밉상인 경우가 종종 있다. 한솥밥을 먹는 동갑내기 이종사촌이 비교 대상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게다가 서로의 다름과 차이가 분명한 상황에서는 양쪽 모두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되기도 한다. 늘 뒤처지는 사람은 열등감으로 불행하고 늘 이기는 사람은 질투어린 시선을 받아내는 아픔으로 불행하다. 언니는 늘 이기는 입장에서 미움의 대상이었고, 공부는 잘하지만 나쁜 아이라는 말로 끌어내림을 당하고 부당함을 견디는 10대를 보낸 것 같다. 정말로 성격이 못된 나쁜 아이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타이르고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 흉거리를 삼아서 소문을 내고 어머니에게 ‘언니 딸은 못 돼먹은 아이’라고 시골로 다시 데려가라고 소리치는 것은 미움을 넘어서 보복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런 상황을 어머니와 언니는 그저 당하고 참고 참았던 것 같다. 서울에서 대학까지 공부해야 했기에 어머니는 이모에게 마음에도 없는 동조를 하며 언니를 야단치고 윽박지르는 아픈 일을 해야 했다. 형제도 각자 가정을 이루면 남과 별 차이가 없다. 어쩌면 남보다 못할 수도 있다.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많고,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불만을 넘어서 원망을 쌓는 관계로 뒤틀린다. 핏줄에 대한 의존과 기대는 참으로 끈질기고 터무니없는 것 같다. 그래서 수많은 갈등의 처참한 이야기도 만들어지고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미담도 만들어진다. 하숙집을 정해서 언니들을 공부시켰다면 어떠했을까?

마음고생과 시달림 그리고 교묘하게 요구하는 부당한 대가를 기꺼이 치르며 끝까지 참아내고, 당시에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서울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언니는 기어코 ‘선생님’이 되었다. 어머니는 자부심을 느끼셨을 것이다. 그러나 언니는 곧 종교인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임신하면서 불과 4, 5년 동안의 짧은 교직 생활을 끝마치고 평생을 가정주부로 살다가 교육과는 관련 없는 금융업계에서 일을 했고 지금은 은퇴하고 평안한 삶을 살고 있다. 언니의 삶을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교육에 대한 열의 그리고 이모의 질투를 견딘 결실은 처음 목적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지만, 그 모든 것이 안락한 삶을 위한 것이었다면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생님’으로 살겠다는 목표와는 다른 방향임에는 분명하다. 고작 그 몇 년의 동안의 ‘선생님’ 노릇을 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상처(트라우마)가 너무 컸던 것은 아닐까. 언니가 이모의 유치한 질투를 잠재울 만큼 교활한 영리함을 가졌더라면, 가정생활과 교직을 동시에 해 나갈 만큼 강한 사회적 욕망과 에너지가 있었더라면, 육아를 위한 어떤 도움의 손길이 있었더라면 어떠했을까? 모든 환경적인 요인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개인, 언니의 결정과 책임으로 귀결된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자기 생각과 주장이 있기에, 누구도 기대하고 원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정이나 사회의 조건은 유리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주어진 상황, 그 조건을 얼마나 활용하느냐는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 언니는 그 당시에 그 누구보다도 좋은 조건이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더 풍부한 지원을 해주셨고 이모 댁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면서도 얹혀사는 듯이 구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가정假定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일종의 자기변명이고 자기 옹호에 불과하다. 자기 인생에 대해 그 누구도 핑계를 대거나 변명할 수 없다. 심지어 신의 뜻이라는 둥, 팔자라는 둥 하는 것도 일종의 핑계이며 변명이다. ‘내 탓이오’가 맞는 것이다.

내가 대학교에서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패션디자이너로 취업하면서 봉제 하청공장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거기에는 대학은커녕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중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중퇴한 13~17세의 어린 소녀들이 많았다. 언니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는 전태일과 같은 처지에 놓인 어린 소년 소녀와 노동에 찌들어 미래를 향한 꿈조차 꾸지 못하는 청년들이 많았다. 그래도 우리 형제들은 공장이나 가사 도우미를 하지 않고 오직 공부만 해서 자기만 잘 되면 되는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축복이었다. 물론 우리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공주처럼 성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천차만별이다. 그 천차만별 속에서 자기의 좌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여야만 이 부당불편하고 불평등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부모를 바꿀 수 없고 타고난 유전자를 바꿀 수는 없다. 화내고 원망할 대상이 아니라 다만 극복의 대상일 뿐이다. 누군가는 부자의 정원의 장미로 누군가는 길거리의 패랭이로 지음을 받았고 그것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사실, 이 진실을 일찍 인정하면, 자기만의 삶을 추구하게 된다. 장미는 장미대로 패랭이는 패랭이로. 인정하고 극복을 했다고 해서 변화, 장미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 누구도 어떤 이유도 탓할 대상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통하여 마음의 평안에 이르는 것 같다. 부모 형제도 우리 이웃도 이 나라도. 그냥 펼쳐진, 주어진 ‘상황’이다. 그 상황은 언제나 불공평하게 전개된다. 마치 먼 대양에서 무작위로 밀려오는 파도처럼 특별히 그 누군가에게 더 유리할 것도 더 불리할 것도 없는 그저 닥쳐온 현실일 뿐이다. 파고를 넘던지 아니면 그대로 빠져 죽든지는 온전히 자신에게 달려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른 것과 비교하여 더 좋은 것도 있고 그보다 못한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자연이고 자연의 의지 또는 신의 뜻이라며 애써 원인을 다른 곳에 돌릴 수도 있다. 자연은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절대 없다. 같은 부모 아래서도 못난 자식도 나오고 영리한 자식도 나온다. 이런 현상을 차이라 하고 다름이라고 하기도 한다. 어디에도 평등은 없다. 끊임없는 다름과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아지기를 소망한다. 평등하려고 애를 쓰지만 또 다른 차이를 만들 뿐이다. 이 진리를 일깨우는 저작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 아닐까.

우리 불쌍한 이모는 언니의 단점을 들추고 흉보며 이모 자신의 딸이 더 착하고 예쁘다고 자랑하며 좀처럼 오르지 않는 딸의 성적을 상쇄시켜야 했다. 딸에 대한 위로와 격려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열등감을 달래고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에 불과한 안타까운 행동이었다. 비교 우위를 점하면 지배권이 생긴다. 일종의 영향력이다. 이런 영향력을 갖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능, 사회적 욕망이다. 그런데 이 욕망이 서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야 할 대상에게까지 적용하게 되면 너무나 편협하고 소모적인 경쟁심만 부추기고 갈등과 미움 그리고 단절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모의 열등감과 질투심으로 얻게 된 것이 무엇일까? 언니의 단점을 들추고 미워해서 얻는 게 무엇이었을까? 이종 언니에게 어떤 위로가 되었을까? ‘나는 성적은 좋지 않아도 착하고 예쁜 사람이야!’라는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이렇게 만들어진 경쟁심과 미움은 소원한 경쟁 관계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부모들은 자기 자녀와 다른 사람의 자녀와의 차이와 다름을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못한다. 특히 어떤 특정 부분에서의 차이를 인정하고 극복하지 못한다. 특성으로 간주하더라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포기’라는 방법을 택하며 자녀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준다. 어떻게든 감싸고 변호하려는 태도가 자녀에게는 더욱 치명적이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자식이 우수하고 훌륭하다는 것도 흔쾌히 인정하고 칭찬하지 못한다. 특히 내 자녀가 열등하다고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생각인가? 자연에서도 인간사회에서도 다름과 차이는 존재한다. 모든 개체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우열이 있고 불평등이 있다. 이것을 인정하고 견디는 것은 모든 존재의 숙명일 것이다. 신이 요구하는 것도, 철학자의 충고도 ‘자신을 아는 것’이다. 이 우열의 불평등, 다름과 차이는 우주가 사라지기 전까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 무엇으로도 상쇄되지 않고 위로받을 수도 없고, 그 불평등의 이유를 신이 나 부모에게 따져 묻는다면, 대답은 오직 한 가지 '모른다는 것' 딱 하나뿐이다. 따져 묻고 원망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다. 불평등을 다름이나 차이로 이해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그저 다름과 차이를 불평등의 근거로 삼지 말고 다양성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해보자는 것이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입학시험이 없어지고 추첨으로 학교를 배정받는 ‘평준화’라는 교육 정책이 시행되었다. 평준화? 좋은 학교 나쁜 학교 구분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많은 학교로 쏠리는 현상을 막아보자는 거였다. 지나친 과외 공부로 인한 경제적 부담과 사회와 지역 그리고 계층 간에 발생하는 갈등을 완화해 보자는 것이었을 것이다. 뜻은 좋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평준화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격차는 조금 줄어들었을 수는 있다. 평준화와 평등은 ‘같은 기회를 준다’라는 의미에 가깝지만, 그것 역시 불가능하다. 마이클 샌델 교수 <정의란 무엇인가>가 이 분야의 전문서적인 것 같다. 우수한 능력을 갖추고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 동일하게 기회를 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평등을 심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좋은 것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 기회를 덜 주는 것 또한 불공정이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어릴 때지만 ‘평준화’라는 말은 거짓말처럼 들렸다. 똑똑한 애들은 무엇이든 외우고 문제도 잘 풀어서 좋은 성적을 얻고, 암기력이 부족한 나 같은 애들은 늘 뒷전에서 들러리 역할을 하게 된다. 여전히 명문 학교에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모여들고 더 많은 애들이 더 좋은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있다. 평준화는 그저 차이와 다름에 대한 ‘차별’을 줄여보자는 초라한 미봉책에 불과한 그것으로 생각한다.

두 언니는 대학 전공과 상관없이 주부로 살았고 이종 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우리 언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은행에 근무하다가 은퇴 후 가사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 치열했던 경쟁이 만들어 낸 갈등과 미움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두 언니의 긴 인생행로에서 학교 성적이나 등수는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인생을 결정할 만큼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물론 더 공부해서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거나 사회에서 그 역량을 좀 더 발전시켜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언니는 그럴만한 꿈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언니들 개인이 선택한 삶의 길이 학교 공부나 성적과는 연관성이 적었다. 둘 다 대학 졸업 후 연애를 했고 곧 결혼을 했다. 그리고 자녀들을 낳아서 기르며 소시민으로의 평탄한 삶을 살아갔다. 그 어린 시절의 뜨거웠던 갈등이 꼭 필요했을까 의문이 생기는 지점이다. 어머니가 남편도 없이 농사를 지어 딸을 서울에서 공부시키느라 그토록 고생하지 않았어도 괜찮았고, 언니는 이모 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마음을 다치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삶이다. 대학을 졸업했기에 좋은 배우자를 만났다고 생각할 수 없는 그저 평범한 남자들과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나름 행복하고 평탄한 삶을 이어 갔다. 그리하지 않아도 괜찮았을 것을 그렇게 치열하게 해냈던 이유가 무엇일까? 미래에 대한 특별한 꿈이 있어서가 아니다. 어머니는 그저 남의 자식들보다 더 잘 가르치고 더 좋은 직업을 가지고 조금 더 잘 살기를 바라는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고 언니는 아마도 이종사촌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교에 합격해서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목표였을 것이다. 아마도 언니는 자기만의 어떤 희미한 목표도 정하지 못하고, 경쟁에서 이기는 코 앞에 놓인 단순한 목표만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저 남들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것은 아닐까? 언니뿐 아니라 대부분의 청소년 시절의 학교생활을 추동한 것은 다분히 경쟁심이었거나 원하는 직업을 얻기 위한 자격 취득이었을 것이다. 자신만의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이라기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보다 나아지고 싶은 욕망, 그저 편안히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경쟁에서 이기려 했을 지도 모르겠다. 자기에게 적합하지 않거나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부모님이나 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불필요한 과잉의 노력과 과잉 비교와 경쟁에 힘을 기울이는 것은 아닐까? 라깡이 말한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이라는 말이 새삼 와닿는다.

그릇의 특성과 종류를 보고 내용물의 질과 양을 결정하게 된다. 꿈을 꾸고 노력한다고 해서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성취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삶에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변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조건에서 출발해도 누구 앞에는 걸림돌이 생기고 누구에게는 도움이 기다리고 한다. 그렇다고 주어진 대로 조건과 환경을 핑계 삼아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주체적인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주어진 조건과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고 개선하려는 의지가 인간사회를 발전시켜 왔고 지금과 같은 부와 편의를 즐기게 했다. 아마도 어머니와 언니 또한 그런 노력이었을 것이다. 과정은 그러했지만, 도달한 지점을 보면 그런 노력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부분 젊은이, 아니 모든 사람은 우리 언니처럼 더 나은 미래의 삶을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자본을 아낌 없이 과잉 투자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모든 투자가 과잉이라는 낭비가 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자기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얼마나 더 나갈 수 있는지, 더 나가야 할 방향과 목적지는 정했는지, 거기에 도달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주 점검할 필요가 있다. 무작정 남 따라서 경쟁하고 이기기 위해 내 달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인생에 담겨야 하는 보물이 무엇인지 보다는 그 삶이라는 보물을 담아낼 그릇을 더 면밀히 살피며 그 그릇을 가꾸는 데 더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웃풋(out put)을 결정하는 인풋(in put)의 질과 양도 매우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용물을 담아낼 수 있는 수용체, 사람의 특성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부여받은 조건과 상황은 원인이 될 수 없다. 같은 원인이 같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뉴턴 역학의 ‘물체의 위치와 운동량을 알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라는 불변의 진리처럼 여겨지던 과학적 주장도 양자역학에서는 ‘그 어떤 것도 정확하게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측정하는 과정에서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과정의 변수,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의 다름이 늘 상존한다. 삶이란 언제나 우연성에 지배받지만, 의지로 그 우연성을 극복하고 그 의지대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점에 주목하는 노력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변화무쌍한 변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결정이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변수, 스스로 만들어낸 변수에 의해 각자의 삶이 결정된다. 그래서 투입된 것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해도 때로는 손해를 보고 절망을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시행착오를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 모든 시행착오 또한 자기 결정이어야 한다. 자기 결정에 따라 노력도 하고 투자도 한 것이다. 지금은 지난날의 자기 결정의 결과이며, 현재의 결정은 내일의 자기가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누군가보다 앞서기 위해, 누군가보다 더 잘 살기 위해 그 누군가와 자기를 비교하는 것은 진정한 비교가 아니다. ‘비교’란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근거하여 견주어 차이와 공통점을 파악하는 것이다. 타인을 비교 대상으로 삼는 것은 타자를 자기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자기 기준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기준이란 자기 목표라는 말이다. 자기 기준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 최소한 자기가 무엇을 정말로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의 성격과 특성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주어진 조건과 환경 속에서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아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수많은 핑계와 자기 합리화가 작동한다. 가정 형편, 지적 능력, 인물, 인맥, 학력, 경력 등등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고 핑계가 될 수도 있다. 정직한 자기 탐구가, 냉정 냉철한 자기 진단이 필요하다. 자기만의 행복과 가치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자기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그대로 살아가기 위한 자기만의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과 비교하면서 수시로 자기를 점검하며 점점 더 자기가 원하는 자기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실천해 보는 실험 대상으로 나를 선택했다. 그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곁길에서 비교는 오직 내가 정한 기준에 따라 나 스스로와 경쟁하면서, 등수를 정할 필요도 없는 곁길을 걸어가고 있다. 어머니가 늘 1등만 하는 이웃집 친구 “진영이 좀 봐라!”를 아무리 외치셔도 나는 진영이의 뽀얗게 예쁜 얼굴만 보았다. 몇 년에 한 번 만나는 진영이는 내 평생 친구다. 공부 잘하는 진영이도 우리 언니처럼 그렇게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나는 여전히 다름과 차이를 만드는 일에서 즐거움과 의미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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