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 뭘까?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인류가 시작된 이후 결혼을 통해서 가족을 구성하는 것, 즉 짝을 지어 살며 후손을 생산하고 양육하는 것은 종족 보존을 위한 본능이며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삶의 방식이자 목적이었다. 이제는 그와 같은 본능은 점차 약화되고 있는 것 같고, 개인의 생존을 위해 굳이 가족을 구성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다. 종족 보존에 대한 의미도 약해지고 배우자와 함께 하는 것이 생존에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다가 죽겠다고 한다. 사람을 포함한 암수로 구분된 모든 개체들이 짝을 이루어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고 짝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낙오자'와 같은 취급을 받아왔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여 혼자서도 즐겁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결혼은 다양한 삶의 선택지 중에 하나가 되었다. 또한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능력'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10명 중 8-9명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며 가족을 구성하고 그 속에서 안정과 행복을 찾으며 가족을 위한 삶을 자기 삶의 의미 가치로 여기며 살아간다. 2022년 조사에 따르면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한다' 17.6%, '가능한 한 하는 것이 좋다' 47.4%, 로 결혼을 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 조사자의 65%에 해당한다.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35.0%로 나타났지만, 안 해도 된다고 응답한 사람들 중에도 많은 사람이 결혼을 하고 살아간다. 최근 몇 년 동안의 변화를 보면,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한다'라고 응답한 사람은 점차 감소하고, '가능한 한 결혼하는 것이 좋다'는 응답은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결혼은 삶을 위한 필수는 아니지만 결혼하는 것이 더 났다는 것이다.
'자녀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라고 응답한 사람은 61.7%에 해당한다. 결혼을 하는 것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자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비율이 낮다. 이것은 결혼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자녀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 자녀를 낳는 것 또한 결혼한 사람들의 선택임을 의미한다.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성격(63.1%), 그다음 직업(13.7%), 재산(10.7%)으로 나타났다. 결혼뿐 아니라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데는 개인의 성격이 매우 중요하다는 보편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 성격만 좋다고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결혼이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결혼을 위한 다른 여러 가지 고려 사항 중에 성격적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혼을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혼 이유를 물어보면 '성격 차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격이 결혼이나 이혼을 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조사를 통해서는 결혼을 하는 분명한 목적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가능한 한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배우자에 대한 사랑, 믿음 등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에 대한 이유가 많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결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왜 결혼하지 않았어요?"라고 궁금해 하지만 결혼한 사람에게는 "왜 결혼했어요?"라는 결혼 자체의 두는 의미는 자주 묻지 않는다. 결혼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결혼한 이유에 대해 궁금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한 것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것이 철학이다. 결혼에 대해 철학을 한 번 해보기로 하자!
결혼한 사람에 대해서도 “왜요?”라고 물어볼 수 있다. 왜 그렇게 별 볼 일 없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그렇게 지지고 볶으며 사는지 그 이유를 물어볼 수도 있고, 어떻게 그런 킹카나 퀸카를 꼬드겨서 평생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그 재주가 무엇인지, 미모, 돈, 권력 등 모든 면에서 그렇게 수지맞는 짝짓기에 성공한 노하우를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정말로 사랑해서 결혼했고, 많은 어려움을 함께 견디며 따뜻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룬 훌륭한 사람들에게도 “왜 결혼했어요?”라고 물어볼 수 있다. 이유는 그 개인의 삶에 관한 철학에 따라 다를 것이다. 아마도 그런 현실적이고 부분적인 이유 속에 정신적 ‧ 사회적 ‧ 심리적인 근본적 원인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수' '보편' '평범' 이런 말에 안심한다. 단 한 번뿐인 자기 삶인데도 다수의 삶의 방식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에 쉽게 편승하여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다름이나 차이가 가져오는 불편함보다는 동일시에 의한 안심을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결혼을 통해서 평범한 생활에 안주하고 세상 이치라는 근거가 약한 삶의 원리를 따르며 자유에 대한 개인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조절한다.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결혼을 하는 것일까? 어떤 좋은 점, 어떤 장점이 있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결혼을 선택하는 것일까?
결혼을 왜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예술 작품에서 나타나는 결혼의 다양한 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첫째, 결혼은 인생을 건 거래이며 계약이다.
결혼은 부와 권력을 확장하고 더 잘 살기 위해서 두 집안, 두 사람이 결속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런 정략결혼에서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조건에 대해 정확하게 따져보고 어느 한쪽도 억울하거나 손해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결혼은 일종의 계약이기 때문에 증인과 증거도 또한 중요하다. 서로에 대해 인간관계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증거는 두 사람, 두 가문이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공증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작품은 결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그림이다. 사전 정보 없이 이 그림을 바라보면, 남녀가 손을 잡고 있는 것 말고는 이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 것인지, 어떤 관계인지 알 수가 없다. 주인공인 두 남녀의 표정은 너무나 엄숙해서 숨이 막힐 것 같다. 결혼식 장면을 떠올릴만한 어떤 분위기나 행복한 표정은 찾아볼 수었다. 나이 많은 부자 남자가 어린 소녀의 손을 잡고 무엇인가 선서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은 결혼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결혼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상징들이 그런 사실을 알려준다. 그림 중앙에 남녀가 손을 잡고 있는 윗부분에 톱니 모양의 거울 속에 화가인 얀 반 에이크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넣음으로써 결혼의 증인이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중의 증거자료를 만들었다.
이 그림은 1434년 플랑드르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1395∼1441)가 그린 루카 출신의 조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rnolfini)와 잔느 드 쉬나니(Jeanne de Chenany)의 결혼식 초상화다. 이 작품에 대한 해석에는 여러 이견이 있지만 이 그림이 결혼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에는 일치된 견해를 보인다. 이탈리아의 상인 아르놀피니가 또 다른 이탈리아의 유명한 은행가의 손녀 쉬나니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결혼은 계약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의 아내이고 남편인지를 확인해 주는 증거가 필요하다.
계약은 서로가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들이므로 이루어지는 거래이다. 모든 거래와 계약에는 서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 그래서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의무와 책임이 균형을 이루는지 면밀하게 따져보게 된다. 결혼은 의무와 책임이 따르는 인생을 건 일종의 거래다. 사랑의 감정으로 시작했다고 했다고 해도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결혼은 모험이 따른다.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많은 세월을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중대한 계약이기 때문이다. 남녀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남녀상열지사와 같은 비합리적인 요소가 어느 정도 개입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남녀 간의 조건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비교적 매우 합리적인 계약이 바로 결혼이다.
둘째, 결혼은 운명, 신의 뜻이고 배우자는 팔자가 결정해 준 사람이다.
결혼이 남녀 두 사람, 두 가문 사이의 조건을 따져보고 이루어지는 합리적인 계약이기도 하지만, 신이 결정하고 명령을 내린 피할 수 없는 가족 관계 맺기, 부부 되기로 생각할 수도 있다. 부모가 맺어준 배우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 것 또한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신과 부모가 결정해 준 결혼 또한 신과 부모의 입장에서 남녀의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여 정혼을 하게 된다. 그러하니 신과 부모를 믿고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결혼은 결혼 당사자들 자신이 서로 간의 조건을 따져보거나 성격을 맞춰보는 등 결혼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부모나 신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 수동적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결혼이다. 자기의 운명이 신이 나 부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순종이 미덕이며 지고의 아름다움으로 간주되던 시절의 결혼이다.
현재도 그렇지만 개인의 운명은 그가 속한 환경에 크게 좌우된다. 자기의 환경을 극복하거나 개선하려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속한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많은 사람들은 결혼을 통해서 자기의 환경 또는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기대가 있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환경 결정론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결혼이나 삶이나 자기가 속한 사회 안에서 거의 대부분 결정된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결혼은 개인이 처한 환경에서 결정되는 운명의 하나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의 3대 거장 중 한 명인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의 작품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결혼이 신이 맺어준 성스러운 의식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대의 결혼은 운명이다. 신이 맺어준 관계 아니면 부모님이 맺어준 관계를 받아들이고 따르며 사는 것이 미덕이었다. 자신이 자기의 삶을 결정하겠다는 것은 신과 부모님을 거역하는 것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시절이라고 해도 남자는 여자보다는 주체적인 선택권이 훨씬 더 많았다. 특히 부와 권력을 가진 남자는 자기가 원하는 여성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운명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하지만 여자에게 결혼과 남편은 운명이었다.
<성모마리아의 혼인>은 신이 정한 인간 구원이라는 사명을 위해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결혼은 신에 대한 순종이며 운명에 대한 순종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팔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주어진 배우자를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팔자를 고친다'는 말도 있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 자기 선택권, 자기 결정권을 운명에 맡기고 주어진 배우자에 대해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겠다고 공표하는 것이 이 시대의 결혼이다. 삶의 목적, 존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마리아와 요셉도 신을 대신하는 교회 권위자 앞에서 손을 잡는다. 결혼은 운명이고 그 운명이 정해준 길을 가기로 결정하는 의식이다.
지금도 자녀들을 이렇게 결혼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런 결혼은 가족을 이루어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목적보다는 무엇인가 삶에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결혼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결혼이 늘 불행한 것은 아니다. 배우자에 대해 만족해하며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결혼 생활에 대한 만족이나 행복은 어떤 목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결혼을 했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결혼 이후에 배우자를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느냐에 달려있다. 요셉과 마리아뿐 아니라 부모가 시키는 대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두 남녀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평생 잘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기의 운명으로 배우자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존중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방식의 결혼과 가정생활이 가장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것일 수도 있다.
세 번째, 결혼은 전통이고 관습이며 삶의 한 방식이다.
결혼은 삶의 과정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배우자를 만나서 자녀를 생산하고 기르며 사는 것을 인생 그 자체로 여긴다. 결혼을 통해서 부와 권력을 확대하고 신분 전환을 도모하려는 의도는 거의 없다. 그냥 서로 어울리는 상대를 찾거나 서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함께 하며 자녀를 낳아 기르며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삶이 인생이라고 믿는다. 결혼이 선택이라는 생각 조차 하지 않는다. 부모가 찾아준 배우자이든 자기가 찾아낸 배우자이든, 누구든 간에 결혼을 하는 것이 세상의 섭리고 이치라고 믿는다. 그래서 아래의 그림처럼 마을의 청춘 남녀가 함께하며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시작점을 알리고, 축하하기 위해 잔치를 열게 되는 것이다. 결혼을 굳이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계약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인생의 하나의 과정으로 때가 되어 짝을 찾아 만나고 함께 살아가고자 의식을 치르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서 기르며 삶을 영위할 뿐이다.
위의 작품은 기지가 넘치는 프랑 드르 화가 피터 브뢰헬(Pieter Bruegel, 1525-1569)이 시골 마을의 결혼 잔치를 그린 것이다. 결혼하는 날은 잔칫날이다. 모든 사람이 모여서 새로운 가정을 이룰 신랑 신부를 축하하고 음식을 나누며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의미 있는 날로 기념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삶을 이어가는 중요한 변곡점이 바로 결혼이기 때문이다. 신이 맺어준 것도 아니고 부모님의 권위에 따른 것도 아닌 그냥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왜 굳이 결혼을 해야 할까?”라고 의문을 갖지도 않는다.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것처럼 결혼을 삶의 과정이라서 여기며 짝을 찾아서 가정을 이루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결혼 생활의 어려움을 알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결혼은 신의 영역, 운명의 영역이 아니고, 피하고 싶을 만큼 힘든 것도 아니다. 그저 조금 참고 견디며 살아가면서, 소소한 행복을 즐기며 그 속에서 보람을 찾는 말 그대로 평범하고 평안한 삶의 과정이다. 이 작품은 결혼은 그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인간 삶의 과정이며 삶의 방식인 것이다.
네 번째,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다. 사랑하니까 함께 살고 싶어서 결혼한다.
'두 분은 왜 결혼하셨어요?'라고 물어보는 질문에 대해서 '사랑해서, 한눈에 홀딱 반해서, 이 사람 아니면 안 되겠다 싶어서 등등, 상대방에 대한 끌림이나 선호 때문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다. 과거와 달리 이런 대답이 많아지는 이유는 남녀 모두 배우자에 대한 자기 선택권이 확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가 정해준 배필보다는 각자의 생각과 기호에 따라 이상형을 상상하고, 그 이상형에 가장 근사치의 배우자를 찾아 결혼을 하려고 한다. 이상형을 만나서 사랑을 하고 부부의 연을 맺어서 평생을 함께 살며 삶의 의미와 보람을 만들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것이 결혼을 하는 사람들의 꿈이다. 이렇게 시작한 결혼이 가장 순수하기는 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결혼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과 감정은 늘 변하고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고, 아무리 굳은 다짐이나 약속이라도 세월에 의해 퇴색되고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 함께 살아가면서 가까이서 보는 배우자는 많은 차이가 있기 마련이고, 그 차이는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서로에 대한 불신은 불평을 낳고 급기야 이혼을 생각하게 된다. 감정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사랑, 특히 남녀 간의 사랑은 이성이라기보다는 감성이다. 감성은 변하기 쉽고 회복은 쉽지 않다. 한눈에 반하여 마음을 빼앗겨서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했지만 급기야 이혼을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감성적인 면에 치우친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 처음 만났던 그 감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면 결혼 생활은 낙원이 될 수도 있고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은 항상성이 약하여 변화무쌍하다. 사랑해서, 반해서 하는 결혼을 유지하려면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상의 4가지 결혼 중에 실패 확률이 적은 가장 이상적인 결혼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개인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인생관이나 세계관에 따라 4개의 방법을 적절하게 섞어서 각자에게 맞는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보다 정확하고 깊이 있는 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많은 미혼의 사람들은 결혼을 해서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을 더 선호하고 있다.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더 정직하고 더 적나라하게 따져보려고 한다. 재미있을 것 같다.
"그냥 독신으로 살래요!"라고 의미 없이 내뱉는 말은 경솔함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자기의 인생을 가벼이 여기는 것처럼 들린다. 인생의 반려를 만날 수 있는 기회, 혼자 사는 것보다 더 즐겁고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이다. '우리 아이들은 혼자 산대요!"라고 당연한 것처럼 말하는 부모들을 가끔 만난다. 이 또한 자기 자식들에게 주어질 미래의 다양한 삶의 기회를 고려하지 못한 태도이다. 혼자 사는 것이 그렇게 편하고 쉽고 자유롭고 행복하기만 하다면 왜 아직도 많은 사람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인지 보다 심도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결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혼자 살아갈 능력이 없어서 결혼을 한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그냥 독신으로 살겠다'는 말은 '나는 배우자를 못 찾았어요. 그럴 능력이 없어요'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다. 자기 인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 아니라면 자기의 미래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자기 인생을 놀이쯤으로 여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부모 된 사람들이나 인생 선배들은 젊은이들의 생각이 부족한 말을 들었을 때, 보다 진지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이니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고 말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결혼은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기회다. 결혼을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는 그렇게 쉽게 결정하고 아무 데서나 떠들어댈 가벼운 얘깃거리는 아니라는 말이다. 왜 결혼을 하려고 하는지, 왜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분명한 자기 인생철학이 있어야 한다. 결혼이 당연한 세상 이치라는 생각 또한 자기 인생을 자기 주도적으로 살지 않겠다는 말이다. 결혼 생활이 힘들고 복잡해서 그냥 혼자서 자유롭고 편하게 살아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다이아몬드 원석에 오물이 묻었다고 버려버리겠는 사람과 다름없다. 돌 속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 원석 같은 결혼을 진짜 보석으로 만들 수 있는지 아닌지 자기 자신에 대해 보다 깊이 있고 솔직하게 알아보아야 한다.
결혼을 하던지 하지 않던지 간에, 결혼을 하겠다는 사람도 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전통이나 관습 또는 본능이라는 타성에 젖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자기만의 철학 또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결혼이 적합한 제도인지 따져 봐야 한다. 그리고 결혼을 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찾아낸다면, 그에 적합한 여자나 남자를 찾아서 결혼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결혼을 하게 된다면, 아마도 함께 살아가기 위한 서로의 길들이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보다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견디고 참아야 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어려움을 최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이혼이라는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더 즐겁고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착하고 똑똑한 좋은 남자나 여자를 만나서 잘 먹고 잘 사는 안락하고 화려한 삶과 자식을 낳아 잘 기르는 것이 지고의 행복이라 여기며, 그러한 가정을 꾸리고 유지하기 위해 부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은 진정한 결혼은 아니다. 인간의 결혼은 개인의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해 가정이란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가치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배우자를 정하고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며 서로의 존재 가치를 향상하며 살겠다고 약속하는 결혼이라면 가장 이상적인 결혼일 것이다. 결혼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면 보다 신중해지고 그 결정에 따른 상호 책임을 기꺼이 감당하는 성실하고 지혜로운 결혼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결혼에 대한 이러한 개념 정의를 분명히 한다면, 신중하게 배우자를 찾게 될 것이다. 나아가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의 존재 가치를 높이는 데 행복과 보람을 느낀다면 정말로 바람직한 결혼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하고 이혼하기를 반복하면서 감정과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단 한 번뿐인 삶, 자기 인생을 정말로 가볍게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일 수 있다.
각자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니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 다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인생을 함부로 막 대하는 것이다. 결혼은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 예의, 존중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런 가족 공동체, 남편과 아내라는 이유로 이해 양보 협력하는 것이 자기에게 적합하지 않고, 자기만의 삶의 목적을 이루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판단이 선다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다수가 늘 옳은 것은 아니고, 일반화된 전통이나 제도가 모든 개체에게 적용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넓고 큰길보다 좁은 곁길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도 하는 것이다. 곁길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닫힌 사회다. 지금은 모든 선택이 가능한 세상이다. 남녀 한 쌍으로 이루어지는 혈연 가족뿐 아니라 다양한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사회다. 단독 가구로서 평생 그 누구와도 가정과 유사한 공동체를 구성하지 않고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는 있는 세상이다. 결혼이라는 큰길을 따라 많은 곁길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곁길이 어떤 길이냐는 것이다. 아직은 확실하지 않더라도, 어렴풋한 방향만이라도 정해진 곁길인지 아무런 방향성 없이 그저 큰길에서 벗어난 것인지 살펴볼 필요는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냥 길을 잃는 것이다. 곁길은 길을 잃고 헤매는 오리무중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