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길에서-결혼, 할까 말까!

섭리-종족 보존의 사명

by EunJoo Shin

지난 글에서 예술 작품을 통해서 결혼을 하는 이유와 결혼이 이루어지는 형태를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결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 결정하기 전에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결혼은 자연 속의 동물처럼 종족 보존을 위한 본능이 아니라 인간 개체가 삶의 영위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 결혼은 '하나 되기'?


남녀 각각은 불완전한 개체이며 둘이 합해져야 완전한 ‘하나(?)'라는 생각은 인간의 오랜 관습이었고 이런 관습을 따르지 않는 것은 쉽지 않다.


신이 인간 하나를 만들었다. 하나가 외로워 보여서 그 하나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나를 더 만들었다. 먼저 만든 사람을 남자라 하고 나중에 만든 사람을 여자라 했다. 이 둘은 원래 하나(자웅동체?)였다. 신의 사람, 아담 창조가 불완전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생식만을 위한 몸이면 자웅동체만으로 충분했다. 신은 아마도 '혼자'의 의미를 알았고 혼자는 외롭다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혼자 존재하는 아담의 외로움을 경감해 줄 필요를 느꼈다. 혼자의 외로움을 미리 예측하지 못했다고 신의 전지전능함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창조의 과정이 '진화적(?)'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나중에 만들어진 여자가 남자보다 조금 더 진화된, 발전된 것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여자의 수명이 더 긴 것일 수도 있다.(개인적인 생각)



아담과이브.jpg 뒤러, 아담과 이브, 판화, 25 x 19 cm, 1504, 르베르죄르미술관, 프랑스

위의 작은 판화 작품에는 최초의 남자와 여자의 아름다운 신체 표현과 함께 많은 상징이 들어있다.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금단의 열매,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따먹은 후에, 남자에게 건네주는 장면이다. 뱀, 고양이, 토끼, 소, 사슴은 이 두 사람의 특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팻말에는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가 1504년에 만들었다. (ALBRECHT DVRER NORICVS FACIEBAT 1504)”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이상적인 신체 비례와 근육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의 다름을 보여준다. 이 둘은 한 쌍이지 결코 하나가 아니다. 최초의 남자와 여자는 하나가 아니다. 비록 여자가 아담에게서 시작되었지만 아담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브는 아담과는 전혀 다른 개체다. 온전한 개체다.


이미 둘로 나누어진 상태를 다시 완전한 하나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없다. 하나가 외로워 또 다른 하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같이 있는 것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결혼을 “하나 되기”라고 말한다. 잘못된 주장이다. 결혼 생활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바로 결혼이 '하나 되기'라는 오해에서 시작된다. 종족 보존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신체적 결합 또한 일시적, 부분적일 뿐이고 결코 한 몸이 될 수 없다. 이미 나뉘었기 때문이다. 하나가 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다.


결혼이 하나 되기가 아니기 때문에 결혼을 해도 여전히 외롭고 고독하다. 한 몸이었던 아담과 이브도 신의 질책과 물음에 각자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고 상대방 때문이라고 핑계를 댄다. 아담은 신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 대해 "당신이 만들어 준 여자, 아내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 신체적 정신적으로 어린 어른들이 늘 '엄마 때문, 아버지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신에 대한 최초의 원망과 최초 부부싸움이었다. 개체는 언제나 외롭고 고독하다. 다시 잠들게 하고 또 다른 개체를 만들어낸다 해도 여전히 외롭고 고독하다. 자녀를 많이 낳아도 여전히 부모는 힘들고 외로운 것처럼 말이다. 혹시 사는데 바쁘다 보면, 외롭고 고독한 것을 잊고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신도 고독해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것이다. 소통의 대상이 필요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모든 개체의 운명이다. 아담과 이브의 행동을 보아도 그것은 너무나도 분명하다.(이들의 이야기는 구약성경 창세기를 참고하기 바란다.)


■ 결혼의 목적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들의 경우는 그냥 처음부터 암수 개체로 만들어졌다. 왜냐하면 성경에 수컷의 몸 일부에서 암컷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암수가 한 쌍을 이루어 죽을 때까지 함께 사는 생명체는 사실 몇 종류가 되지 않는다.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포유류는 5%도 되지 않지만 9,700종의 조류의 90%는 일부일처제를 유지한다고 한다. 조류의 대부분은 일부일처제이지만 그중 10% 정도는 부성 불일치(父性不一致)를 보인다고 한다. 바람을 피웠다는 뜻이다.


동물이 평생 동안 하나의 배우자를 유지하는 이유는 아마도 좀 더 효율적으로 후손을 낳아 기르기 위한 것이라 여겨진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의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의 경우는 유전인자를 전수하는 생명의 지속성이라는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이유 외에 심적 ‧ 사회적 안정, 경제적인 협력 등 복잡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사회적 전통과 관습으로 굳혀지고, 남녀가 함께 짝을 지어 가족이라는 혈연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짝을 이루어 사는 것이 생존을 위해서 더 많은 이점이 있는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요즘에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더 자주 듣게 된다. 이 말은 미혼 남녀가 그냥 한 번 해보는 헛소리 거나,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는 이성이 없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자기변호일 수 있다. 예전에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은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3대 거짓말 중에 하나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냥 해보는 헛소리나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결혼을 하지 않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전문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 독신으로 살아가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전문직이 아니더라도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는 직장을 가지고 있거나, 부모가 물려준 안전하고 풍부한 생활 자금이 있는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큰 걱정 없이 자기 인생을 즐기며 편안하게 혼자 살겠다고 말한다. 이런 기류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 같다. 60, 70대에서도 단 한 번도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40, 50대 이하로 내려오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고 있는데, 남자보다는 여자가 미혼 독신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한참 지난 자료이기는 하지만 2015년에서 2019년까지 우리나라 남성 미혼율은 25~29세에서는 64.4%에서 90%, 35세~39세에서는 6.6%에서 33%, 40~44세 2.7%에서 22.5%로 대폭 증가했다. 여성 미혼율도 25~29세에서는 29.6%→77.3%, 35세~39 세서는 3.3%→19.2%, 40~44세에서는 1.9%에서 11.3%로 급속하게 증가했다(보건사회연구원의 ‘보건사회연구, 2019년). 아래 근래의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 청년세대 30에서 34세 결혼 적령기 미혼자가 절반을 넘어가고 있다고 한다.



청년세대 결혼추이.jpg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 이제는 그냥 해보는 헛소리가 아니라는 증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런 조사 결과는 현상일 뿐이다.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현상을 만든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서다. 이런 통계자료를 가지고 정부는 인구 정책을 세우고 기업은 마케팅 전략을 세우기도 한다.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는 사람들의 행복에 기여하려고 결혼과 가정생활이 인간에게 주는 이점을 확장하는 연구를 시작한다. 그러나 나와 같은 예술가는 시대를 읽고 그 시대정신을 표현한다.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보다 더 날카롭고 예리한 관점에서 현상을 파악하고 표현한다. 함께 하는 외로움이나 고독이 혼자 사는 고독보다 더 견디기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차피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고 했다. 그러니 좀 더 덜 수고스럽고 덜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비혼을 선택하는 것은 아닐까?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 1904-1987)은 그의 저서 『신화의 힘』에서 “결혼은 시련이다. 이 시련은 신 앞에 바쳐진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고통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진정한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한다.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려면 얼마나 많은 자기 성찰이 필요하겠는가 말이다. ‘너’와 ‘나’가 너도 나도 아닌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신 앞에서 수많은 시련을 견디며, 영적인 동일성으로 나아가야 진정한 결혼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결혼을 위한 철저한 계산, 매우 이성적인 판단을 바탕으로 정신적이고 영적인 시련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시작해야 한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나도 너도 버리고 완전한 하나를 만들어가는 것이기에 ‘자기’라는 온전한 개체를 버리는 아픔을 참아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둘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인 결합을 의미한다. 하나 되는 것은 각자의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시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련의 결혼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결혼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가족 구성원 각자의 것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 같이 사는 두 사람이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으면 그것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여전히 고독한 개체로 살아가는 것이다. 매일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한 이불을 덮고 함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온갖 어려움을 함께 이겨냈어도 늘 외롭고 고독한 것, 늘 상대방에 대한 갈증을 느끼며, 마음에 불만이 부글거리는 이유는 결혼을 통해서 ‘하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지프 캠벨이 말하는 이상적인 결혼이 아닌 대부분의 결혼은 삶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결혼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혼자서 험한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고, 경제적인 능력도 부족하고, 밥 하기 청소하기 빨래하기 등 일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소소한 일들을 해줄 그 누군가가 필요하고, 함께 살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와 현실적인 필요, 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경제적이든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복합적인 필요에 의해서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을 통해서 외롭고 고독하고 힘든 인생길에서 내편이 되어줄 사람을 만들고 서로를 의지하고 기대며 사는 것이 좀 더 났겠다 싶어서 결혼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결혼을 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꿈은 남 보기에 그럴듯한 울타리를 만들고 말 그대로 스위트홈,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자녀를 잘 키워내며 온 가족이 무탈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소망도 그런 것일 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권력이 나 지배욕 또는 소유욕 또는 명성이라는 불치의 중독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큰 집을 장만하고 아름답게 꾸미고, 고급스럽고 세련된 가구를 들이고, 고급스럽고 우아한 실내복차림으로 유기농 식재료로 만든 진귀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정담을 나누고, 멋진 캠핑카를 타고 가족 캠핑을 가고, 가끔씩 먼 나라로 가족 여행을 떠나서 인증사진도 sns에 자랑도 하고,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서프라이즈 파티도 열고 서로를 감동시키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온 힘을 다해 열심히 경제활동을 한다. 돈을 더 갖기 위해 부모를 졸라대고 형제들과 재산싸움을 하고 세상 사람들과 경쟁하고, 굴욕을 견디기도 하고, 심지어는 편법 불법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생각대로 꿈꾸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원대했던 아름다운 기대와 계획을 점점 축소시켜 가며 그냥 아무 탈 없이 하루하루 잘 지내면 그것이 행복이겠거니 하며 살아가게 된다. 아무런 사건 사고 없이 그렇게 살면 되겠거니 하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찬란했던 꿈이 현실에 부딪히면서 부서져 작아지거나 아예 없어지고 ‘생존’, ‘무탈한 생존’만이 남는다.


결혼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결혼의 목적은 단 하나, 누군가를 만나서 그와 함께 좀 더 행복하게 사는 것뿐이다. 결혼이 결혼 주체의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결혼 상태는 심하게 흔들린다. 그래서 요즘 이혼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 같다.


결혼은 각자의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전통이나 관습, 부모의 압력, 사회적 분위기 등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는 오직 자기 선택이다. “~때문에”라는 것은 인생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오래전에는 부모님이 짝지어준 사람과 혼인을 해야 했고,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처럼 상대방을 받아들여야 했다. 지금은 오직 자기 자신의 필요와 목적,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 결혼을 선택할 뿐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매우 다양할 것이다. 결혼의 선행조건이 되는 남녀가 서로 만날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야말로 아무리 찾고 찾아도 연애 상대를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그냥 자기 삶을 바쁘게 살다 보니 연애할 시간이 없을 수도 있다. 어쩌다 대상자를 만나도 서로가 원하는 결혼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또한 최근 경제적인 여건이 어려워지면서 연애, 결혼, 자녀 세 가지를 포기한다는 ‘3포 세대’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보다 훨씬 더 폐쇄적이고, 더 가난하던 시절에도 어떻게든 남녀가 짝을 이루어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도 보다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입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시집을 보내야 했고, 좀 더 잘 사는 집안과 혼인을 해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고, 자녀가 노동력이었고, 노년의 삶을 책임져줄 보험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혼자서는 먹고살만한 일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결혼은 생존의 한 방법이었다. 물론 현재도 배우자의 경제력에 의존해서 좀 더 편안하게 살기 위해 결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마디로 결혼하는 이유는 세상이 바뀌어도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옆구리가 시리거나 완전하지 못한 반쪽짜리 개체가 아니라 온전한 하나가 되기 위해 결혼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는 이유도 매우 다양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유가 어떠하든지 간에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면 결혼을 하는 것만큼이나 존중받아야 한다. 결혼을 하고 싶지만 적당한 이성을 만나지 못했거나 상황이 허락지 않아서 결혼을 하지 못했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면 각자의 인생이니 누구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결혼을 하고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정상이라는 생각은 다수의 생각일 뿐이고, 옳은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생산하여 양육하며 사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하며 이런 이치에 따르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거나 불효로 취급하기도 한다. 인구 절벽, 인류 멸종의 문제를 야기시키기 때문에 결혼은 해야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고, 결혼을 포함한 삶의 모든 것은 개인의 결정에 달려있다. 개인이 자기 삶을 결정하고 자기 인생에 대해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미 벌어진 것들, 자기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어떤 부모,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느냐는 개인이 결정할 수 없지만, 그 외에 삶에서 일어나는 대부분 일들은 개인의 선택과 결정에 의한 것이다. 어떤 이유이든 간에 결혼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하면 그만이다. 정말로 확실하게 독신으로 살고자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 현실적 계산과 철학적 성찰의 필요


결혼의 유익을 계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혼자서 살 수 있는 사람인가를 심각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요즘 ‘결혼에는 별 생각이 없어요.’ 또는 ‘결혼 안 하기로 했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 “왜요?”라고 묻는 것은 유치한 호기심의 표현이다. “아! 그렇군요!”라고 말하면 된다. 누군가의 의견을 들었을 때, 특히 자기 인생,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나 주장을 들었을 때 “왜?”라고 묻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질문이다.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는데, 그 이유를 물어보고 알아내서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그냥 얘깃거리를 삼고 말 것이다. 늘 남의 얘기를 퍼 나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캐물을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생각대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세상이다. 단지 다른 사람, 그게 가족이든 친구든 동료든 아니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든 그 누군가에게 또는 사회의 짐이 되거나 해가 되는 삶이 아니면 된다. 물론 어떤 결정이나 그 결과가 누군가에게 유익이 되고 즐거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훌륭한 결정이고 삶이다. 각자 자기가 결정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 결정이 삶의 어느 기간 동안은 자기에게 만족과 행복을 주겠지만,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다른 사람들, 자기가 속한 사회에 무익하거나 오히려 짐이 되고 해가 되는 삶이 될 수도 있다. 수십 년 동안 지속되는 삶의 여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저 결혼생활이 복잡하고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밖에는 다른 할 말이 없다. 자기 인생에 대한 깊은 고민과 철저한 계획을 바탕으로 내린 결정이고 언표라면 그것은 존중받아야 할 개인의 자기 결정이다.


누군가는 국가와 사회 발전을 위해서 자녀를 생산하고 인구 멸종을 막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결혼한 사람들의 몫이고, 자녀를 생산 양육하지 않는 대신에 그에 버금가는 가치 있는 일을 세상에 남기고 가겠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 있게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대답할 수 없다면, 결혼하지 않고 자녀를 생산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과 인류에 무익하고 이기적인 개인주의자로 살다 죽겠다는 것일 수도 있다.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녀를 생산하는 것이라고 했다. 철학자 한 사람의 주장만은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개인이나 인류 전체를 위해서 매우 의미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결혼했거나 안 했거나 상관없이 사람으로 태어나 자녀를 생산하지 않고 죽는 것은 인류를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책무를 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책무에 버금가는 일을 찾아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단 한 번만 사는 인생이다. 그리 만만치 않다. 결혼을 했거나 안 했거나 자기 자신이 이 세상과 인류의 미래에 유익한 존재인지 무익한 존재인지 끊임없이 성찰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난 후에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한다면 한 번뿐인 인생을 좀 더 멋지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혼자서 평생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만도 않고 편안하지도 않다. 물론 결혼해서 사는 것도 쉽지 않다. 어떻게 할까? 더 따져봐야 한다. 살다 보니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살거나 어쩌다 보니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게 되었다는 것,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삶은 '떠밀려 사는 사는 삶' '강물처럼 그저 삶이라는 조류에 떠내려가는 삶' '수많은 타자를 기대어 사는 삶'일뿐이다. 단 한 번뿐이 자기 인생이니 좀 더 깊이 넓게 그리고 오래 생각해 보고 현실적인 조건과 상황을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다음에는 ‘결혼과 비혼 - 현실적인 판단’에 대해 알아본다.

작가의 이전글곁길에서-미술작품 속의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