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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누구나 각자의 속도와 때가 있다.

#17. 기다림과 배려의 중요성

by 한동훈


야 점심시간이다. 빨리 달려.


예전 학창시절의 추억을 하나 떠올려 보면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우리들은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에 푹 빠져 있었다. 특히 점심시간에는 식사 후 학교 컴퓨터실에서 합법적(?)으로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식사를 다 마친 사람에게 선생님이 우선권을 주었던터라 점심시간이 시작되면 학교 급식실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4교시 종료 땡이 울리자마자 아이들이 복도로 튀어나와 전속력으로 급식실로 달려갔고 서로 배식 후 밥을 빨리 먹는다고 정신이 없었다. 비교적 큰 체구였던 나는 밥을 빨리 먹는 것에는 항상 남들보다 자신이 있었다. 특히 학교에서 새싹 참치비빔밥이 나온 날에는 고추장을 넣고 10초만에 비빈 뒤, 다섯숟가락으로 비빔밥을 1분만에 클리어 했고 같이 나온 국은 20초만에 다 마셔버렸다. 이 모든 식사과정을 완료하는데 채 2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당시 점심시간 컴퓨터 게임 자리는 마음만 먹으면 내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밥은 빨리 먹어야 하고, 뭐든지 빨리빨리 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내 생활 습관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와이프나 애들이랑 나들이를 갈 때도 난 항상 늦게 나서면 차가 막힌다고 독촉했고, 아침 식사 후 외출할 때도 "왜 이렇게 천천히 먹냐? 얼른 먹고 빨리 빨리 가자." 며 아이들 입에 들어가지도 않는 밥을 쑤셔넣기도 하였다.


나의 이런 급한 성격은 학교에서도 잘 드러났다. 배식 감독을 할 때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먼저 배식받은 아이들이 식사를 하느라, 뒤의 아이들이 급식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장면이 종종 있었다. 명절 때 고속도로 상황처럼 정체가 심해지는 이런 장면을 난 결코 지켜볼 수 없었다. 난 식사를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 먹은 친구는 친구 기다리지 말고 빨리 빨리 일어나자. 뒤에 친구들 기다린다. 식사 덜한 친구들은 빨리 먹고 나가자." 고 큰소리로 외쳤고 일부 아이들은 식사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일어나기에 바빴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예전에는 시간만 되면 급식 먹으러 쪼르르 가던 일부 아이들이 점심시간이 되었는데도 급식을 안먹으러 가는 일이 발생했다.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서 아이들에게 '왜 밥먹으러 안가니?' 물어보았다. 아이들 대답은 '식단이 별로라서요.' '밥이 맛없어서요.' 라고 했지만 다음날에도 또 밥 먹으러 안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던 나는 한 아이를 불러서 밥을 왜 안먹으러 가는지 진짜 이유를 물었다.


"사실 저희는 밥 먹는 속도가 느려요. 그런데 학교에서 밥 먹을때는 뒷사람 생각해서 뭐든지 빨리 빨리 먹어야 하잖아요? 음식을 음미하면서 맛보고 싶은데 그럴 여유도 없고, 앞에서는 자꾸 빨리 먹어라 압박을 주니 체할 것 같아요. 뒤에 서 있는 애들 눈치도 보이고요. 차라리 이럴 바에는 안먹는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랬다. 뭐든지 빨리빨리 하자는 나의 외침은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밥 먹는데에 지장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식사시간 10분이면 충분하지 뭐' 라는 내 입장과는 달리 아이들 식사속도는 다양했다. 어떤 아이는 10분만 필요했지만 어떤 아이는 30분이 필요했다. 결국 모든 것을 통일적으로 빨리해서 효율성을 추구하자는 내 생각은 식사시간에 계속해서 급식 이탈자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시험 문제를 출제하는 교사들은 4월이 되면 항상 바빠진다. 보통 4월 마지막 주에 학교에서는 1차 지필평가(중간고사)를 보는데, 시험 범위까지 진도를 맞추기 위해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수업진도를 나가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아이들도 힘들어진다. 각 교과에서는 학생들의 3월 적응기간을 거쳐 4월부터 본격적으로 수행 평가를 보기에 바쁘고, 또 수업 진도는 진도대로 나가기 때문에 아이들은 수행과 수업 진도 두마리 토끼를 잡느라 정신이 없다.


나 역시 4월은 그런적이 많았다. 시험 때의 논란과 잡음을 잠재우기 위해 꼭 시험범위까지 진도를 나가야 했기 때문에, 급할 때는 평소 해주던 예습 복습도 생략한 채 수업 내용을 설명하기에 바빴다.


실제 그렇게 수업 진도를 나가고 시험을 치뤄보면 결과는 항상 애들 편차가 심했다. 힘든 시기였지만 끝까지 수업을 잘 따라온 아이들은 좋은 성적이 나왔던 것에 비해, 3월초에는 집중력이 좋았으나 4월 들어 많은 수업내용과 수행평가에 급피곤해하고 집중력이 떨어진 아이들은 성적이 좋지 못했다. 나는 이것을 아이들의 '집중력과 학업 역량의 차이' 라고만 생각했다. 따라서 아이들 별로 성적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다른 아이들에 비해 점수가 떨어지거나 성적이 처진 학생들은 그만큼 개인 학업역량이 부족해서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이런 편견은 작년 한 졸업생을 만나면서 고스란히 깨지고 말았다. 그 학생은 3년전 내가 담임일 때 부반장을 했던 아이였는데 학교 다닐때 성적은 5-6등급 정도 받던 학생이었고, 수업시간에는 자주 조는 모습만 인상적이었던 아이였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지금은 뭐하고 지내냐 물어보니 올해 재수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 준비는 잘 되어가니?"


"네. 선생님. 그래도 올해 6모(6월 모의고사)랑 9모(9월 모의고사) 모두 국영수 1등급이 나왔어요. 저 나중엔 꼭 좋은 대학 가서 유명한 사람 될거에요. 그때 선생님 다시 한번 찾아뵐게요 ㅎㅎ"


"국영수 1등급? 정말? OO이 그 정도 성적까지는 안나왔는데 재수하더니 성적 엄청 올랐네. 대단하다."


"ㅎㅎ 네. 사실 학교 다닐때는 몸도 안좋고 각종 수행에 진도는 따라가기 힘들어서 거의 시험에 손을 놓았었어요. 그런데 졸업하고 나서 시간적 여유도 생기고, 차근차근 옛날 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을 상기하면서 다시 공부해보니 재미도 있고 이해도 잘되더라고요.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서 시험을 보니까 성적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더라고요."


"그랬구나. 쌤은 OO이는 착실하지만 공부는 엄청 잘하는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거 갑자기 미안해지네. OO이가 이렇게 잘할 줄이야."


"괜찮아요 ㅎㅎ 솔직히 학창시절 맨날 졸았던 제 수업태도를 보면 어느쌤이든 그렇게 생각했을걸요. 오히려 제가 쌤들께 안좋은 모습만 보여서 미안하죠. 그래도 한가지 깨달은 것은 있어요. 공부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구나 하는것 말이죠. 비록 남들보다 1년 뒤쳐졌지만 지금 전 괜찮아요.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사회 나가서도 꼭 성공할 수 있을거에요."


그랬다. 늘 피곤에 쩔어서 인상만 쓰고 비실비실거렸던 3년전 OO이는 내가 못본 사이 부쩍 성장해 있었다. 특히 학창시절 5,6등급을 받던 아이는 재수해도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내 생각은 완전히 틀리고 말았다. OO이에게 공부할 "때"는 바로 지금이었던 것이다.


두가지 사례를 겪으면서 나는 기다림과 배려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특히 시간적 효율만 추구하느라 아이들이 편안한 상태에서 밥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던 것에 대해서는 미안함이 몰려왔다. 누구나 밥 먹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은데, 마치 스탑워치로 시간재듯 딱 몇십분 정도의 한정된 시간만 지켜보고 뒤에 애들이 몰려오면 바로 퇴실하게 압박을 준 것은 아이들을 많이 불편하게 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밥 먹으러 학교 간다' 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요즘 아이들에겐 그날 수업 시간표보다 그날 식단이 더 중요한 것인데 말이다. 특히 아이들은 그날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가 나오면 식단표에 하트 뿅뿅 을 정성스럽게 그려놓을 정도로 밥 먹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밥을 일찍 먹게 하거나 일부러 늦게 먹게 하는 방법을 써서라도, 아이들이 여유 있고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제공하고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아이들의 학업 역량에 대해서도 학창시절의 그 모습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내 주변에는 '전문대' 를 다니다가 군생활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해서 현재 '한의사'를 하고 있는 친구도 있고, OO이처럼 재수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공부할 "때" 를 만나서 성적이 일취월장한 경우도 있다. 누구든지 지식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다르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는 시기도 다르다. 그런데 나는 그저 "진도" 라는 이름 아래 아이들에게 수업시간 많은 지식을 던져놓고 얼마나 이것을 빨리 흡수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만 아이들의 학업역량을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OO이의 사례처럼 학창시절 아이들은 생각보다 학업에만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건강이 안좋아서 그럴수도 있고, 친구관계가 문제라서 그럴수도 있고,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럴수도 있고, 신경이 다소 예민한 편이라서 그럴수도 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아이들 각자의 힘든 속사정도 모르면서 단순히 성적을 가지고만 아이들 학업 역량을 평가하고 단정짓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교사인 나에게 필요한 덕목은 아이들 한명 한명을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며 아이들이 학교에서 자신의 역량을 조금이나마 펼쳐 나갈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하고 도와주고 배려하는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학교는 공통적으로 정해진 시간 내 식사를 해야하고, 공통적으로 같은 내용의 수업을 들어야 하는 곳이다. 아이들 각자가 식사하는 시간이 다르고, 아이들 각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의 양과 공부의 속도가 다른데 비해 학교의 일과와 커리큘럼은 항상 일정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환경에 교사마저 부화뇌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기에 앞서 아이들을 따뜻한 인간미로서 품어야 하고 아이들에게 배려와 사랑을 전해줘야 하는 사람들이다. 빠듯한 학교 환경속에서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부터라도 아이들 목소리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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